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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일성’으로 불리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의 살인마지만 다른 분은 우리나라의 독립에 애쓰다 이역만리에서 순국하신 일성 이 준 열사다.
‘일성 이 준 열사 순국 104주기 추념식’이 오는 14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이 준 열사 기념사업회(회장 전재혁. 이하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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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릉참봉직을 맡던 시절의 이 준 열사.
185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이 준 열사는 젊은 시절 과거에 급제한 뒤 순릉참봉직을 지내고 있었다. 1895년 4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나라 앞날을 걱정한 이 준 열사는 순릉참봉직을 그만 두고 상경하여 1895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창립된 법관양성소를 졸업,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奏任官六等)가 됐다. 하지만 부패한 탐관오리들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모함을 받게 되자 33일 만에 면관(免官)되었다.
이 준 열사는 ‘미관말직에 앉아서는 도저히 이 나라의 정치풍토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생각, 서재필․박영효․이상재 선생 등과 함께 민권운동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같은 해 서재필․이승만․이상재 선생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평의장으로 취임해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서재필․이승만 선생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 가담해 만민공동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나중에는 대한보안회에 가입해 총무 직책을 맡아 반대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결국 일제는 매국노들을 내세워 나라를 빼앗기 위한 ‘을사늑약’을 맺었다.
이 준 선생은 1907년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고 서방 세계들로부터 독립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선생과 함께 고종 황제의 밀사 자격으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를 찾았다. 이들의 활약상은 당시 현지 언론에서도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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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황제의 밀사 자격으로 만민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네델란드 헤이그를 찾았던 이 준 열사와 이상설·이위종 선생.
‘헤이그 밀사 3인’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준 열사는 1907년 7월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이 준 열사의 유해는 네덜란드 헤이그 뉘애크 엔다운(Nieuw Eiken Duinen) 시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열사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만인 1963년 10월 4일 조국으로 돌아와 ‘국민장’을 치룬 후 서울 수유리 국립 4.19묘지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열사의 순국 현장인 네덜란드 ‘드용 호텔’은 1995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밀사의 애국심과 위훈을 기리는 ‘이 준 열사 기념관’으로 개조돼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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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는 1963년 10월 4일 이 준 열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 국민장을 지냈다. 당시 모습.
이 같은 이 준 열사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한 추념식에는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 폴 멩크펠트(Paul A. Menkveld) 주한 네덜란드 대사, 한원택 함경남도 도지사, 광복회 석근영 서울지부장 및 광복회원, 학생 및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사 생애 보고, 서울지방보훈청장·함경남도지사·주한 네덜란드대사·광복회장(대독)의 추모사에 이어 유훈낭독, 일성여고 합창단의 추념가 제창,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추념식에 이어 기념사업회 주최로 실시했던 ‘제4회 이 준 열사 추모 글짓기 대회’ 수상자 시상식을 갖는다. 글짓기 대회에는 전국 초·중·고등학생 및 교사, 일반인 등 3,834 여 명이 응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