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 출간기념회서 보수․진보 날 선 공방보수, “민주화운동, 진보만의 결과물 아니다” 강조진보, “민주화 너무 표층적으로 바라봐”
  •  

    1987년 민주화는 민주화세력만의 결과물이었나?

    첨예한 민주대 반민주 구도속에서 진보진영이 선점해 온 민주주의, 그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를 재조명한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도서출판 시대정신)’ 출간기념회가 26일 오후 5시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렸다.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사회통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우리사회에 대한 울림이 결코 작지 않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사단법인 시대정신 이사장)을 비롯 김세중(연세대 교수), 박효종(서울대 교수), 김용호(인하대 교수), 김주성(한국교원대 교수), 이주영(건국대 명예교수), 김형준(명지대 교수) 정진형(경희대 교수) 등 우리사회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과정과 신정치질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등을 객관적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도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특히 책 본문 중 안병직 교수가 본인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고백한 <증언-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좌익운동을 중심으로>은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사건 등 60~70년대 일어난 대표적 공안사건들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여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책은 1987년 민주화가 어떤 혁명적인 과정을 통한 단절이 아니라 건국과 산업화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건국과 산업화가 논리적으로는 민주화의 전제조건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즉 1987년 민주화는 진보진영만의 민주화운동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건국, 산업화와 함께 이뤄낸 복합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집필진의 논리에 대해 출간기념회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논객들이 서평을 통해 열띤 논쟁을 펼쳤다. 

    김세중 교수는 인사말을 통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보수진영과 산업화세력의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이 있었음을 이론적으로 구명하기 위해 노력한 책”이라고 밝히고 “보수진영이 민주주의의 도입과정부터 기반조성, 오늘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주성 교수는 “건국 60년이란 전체가 한국민주주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다며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은 이를 실천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경제 건설 없이는 서구와 같은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없었다”며 “민주주의의 실천을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근대국가를 확고히 해야만 했다”고 강조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이 이어졌다. “북한의 침략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권위주의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前 조선일보 주필)은 서평에서 “지난 권위주의 시대 우리는 민주화만 오면 좋은 세상이 올 것으로 생각했으나 사실을 이와 달랐다”며 “민주화가 되고 보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게 됐고, 이 책은 그 고민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류 고문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마주친 고민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 째는 민주화가 됐어도 무한 적대정치가 만성화되고 있다는 것이고, 둘 째는 대의제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 모두 일정한 한계를 노출하고 있으며, 셋 째는 민주주의의 과잉과 일탈성을 제어할 방도가 딱히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식인들은 천안함 폭침, 광우병 파동으로 인한 촛불집회 등 중대 현안을 두고 좌와 우로 갈라서 이념논쟁만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의제민주주의는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대안으로 등장한 참여민주주의는 집단이기주의적 양상을 보이며 또 하나의 권력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역이기주의와 포퓰리즘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류 고문은 민주화 이후 우리가 겪고 있는 이같은 고민에 대해 이 책의 집필진은 분명한 진단을 내놓고 있다면서 “보수든 진보든 자유, 평등, 박애라는 계몽주의적 가치와 국가에 대한 애정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에 포함된 안병직 교수의 60~70년대 좌익운동에 대한 자기 고백적 증언에 대해서도 “우리현대사를 명료하게 규명하고, 선진적인 민주화를 이루는데 값진 이정표가 될 양심선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류 고문은 지금까지 ‘반권위주의’ 진영의 내부노선 갈등은 세세히 밝혀진 바 없다며 최근 있었던 박범진 전 의원의 고백과 안병직 교수 증언은 민주화 운동에 극좌계열의 학생운동 침투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극좌계열은 79년 발각된 ‘남민전’ 사건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민주화운동에 침투하려고 했다면서 ‘반 대한민국적 혁명’으로 몰고가려는 좌익의 움직임을 더 이상 어물쩍 넘어가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극좌계열이 민주화운동에 끼친 폐해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극좌계열의 움직임만으로도 주류 민주화운동은 번번이 곤경에 빠졌다는 것이다.

    류 고문은 극좌계열의 집요한 침투 움직임에 대해 “당시 공안당국이 극좌세력에 역설적으로 고마워해야 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민주화운동과 ‘바람직한 진보’를 극좌와 단절시켜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같은 보수진영의 시각에 대해 진보진영은 분명한 시각차를 보였다. 

    이부영 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는 “책의 주제는 한국 민주주의를 보수가 이끌었다는 것”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권위주의 체제를 가져갈 수 밖에 없었고, 역설적이게도 권위주의는 민주화를 낳은 어머니였다는 주장인데 이에 수긍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상임대표는 “다른 나라들이 모두 권위주의를 거쳐 민주화를 이뤘는가는 의문”이라며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권위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중대한 안보위기가 발생할 경우 군부가 다시 나설 구실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상임대표는 “경제성장과 산업화 등 인정할 건 인정하지만 군사반란과 친위쿠테타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고 밝혔다.

    87년 이후 민주화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보였다. 이 상임대표는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2008년 진보인 노무현 정권에서 보수인 이명박정권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것만으로 민주화가 완성됐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 상임대표는 과도한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급증, 대학교수 비정규직화, 심각한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등의 위기는 좌파만 걱정하는 현안이냐고 반문하며 직선제 실시, 진보에서 보수로의 정권교체만으로 민주화가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민주화’를 너무 표층적으로만 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이 남북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하면서 특히 중국에 대한 북한의 종속화문제를 방관한다면 민족사적 대실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도 우회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윤 교수는 안병직 교수의 증언에 대해서는 자기성찰의 기록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책의 세부내용에 대해서는 반론을 폈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를 주장한 김세중 교수의 논문에 대해서는 보수의 핵심세력들은 아직도 명백하게 드러난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화해를 말하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거북하다고 말했다.

    진보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을 더 개방적으로 받아들일 것도 주문했다. 진보의 의견을 과감히 받아들여 ‘보수민주주의’의 지평을 더 확대 심화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이다.

    ‘공화정’의 가치를 재조명한 김주성, 박효종 교수의 논문에 대해서는 ‘탁견’이라며 후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역사의 흐름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수는 광우병 파동과 이로 인한 촛불사태를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보지만, 과대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응전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공화정의 핵심 요소인 공공성을 국가 지도층이 무력화 하고 있는 현실-병역면제와 세금탈루-에서 시민들에게만 공적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란 주장도 나왔다.

    윤 교수는 마지막으로 보수가 공화정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보수의 희생과 실천이 전제돼야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책의 대표저자인 안병직 교수는 지병으로 이날 출간기념회에 불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