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from[건국→산업화] to [민주화]는 '혁명적 단절' 아닌 '연속선상'에서 이뤄졌다2. 이승만-박정희, 권위주의로 '자유민주주의' 수호하고 경제발전 달성했다3. 한국 전통 좌익 내건 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다4. 혁명이 불가능한 지금, 진보는 이제 '인민민주주의' 버리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하라5.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경쟁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자
  • 보수가 이끌다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

    <편집자 주> 이 글은 시대정신 이사장 안병직씨가 펴낸 책 [보수가 이끌다-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에 실린 '머리말'이다. 26일 출판기념회를 갖고 발매된 이 책은 보수-진보 양진영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머리말' 전문을 옮겨 싣는다.

    <머리말>

    이 책은 진보진영과의 교류과정에서 탄생된 것이다.

    교류는 여러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진보진영에서는 그간 줄기차게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몰고 왔다.

  • 그러나 87년의 민주화가, 어떤 혁명적인 과정을 통한 단절(斷切)이 아니라, 건국과 산업화의 연속선상(連續線上)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건국과 산업화가 논리적으로 민주화의 전제조건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87년의 민주화는 건국, 산업화 및 민주화운동의 복합적인 산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의문이 사실이라면, 보수와 진보의 대결은 단순한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은 모임의 형태로 진보진영과의 대화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진보진영이 실현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의 모델이 어떠한 것인가를 꾸준히 질문하여 왔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도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항간에 진보진영의 민주주의 모델로서는 참여민주주의나 경제적 민주주의가 제시되기도 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형태의 민주주의도, 이론적으로는 검토될 수 있는 것이겠으나, 현실의 정치체제로서는 실현되어 본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과거의 민주화운동이,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운동이었던가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민주화운동이 무엇이었던가를 회고해 보면, 크게 보아 두 가지 차원으로 갈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민주 회복’의 차원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따라 순수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라는 요구이다.

    둘째는 좌익 측의 요구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청산하고 신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이 ‘민주 회복’의 차원에 머무는 한, 진보진영의 독자적인 민주주의 모델은 없었던 셈이다. 왜냐하면 ‘민주 회복’이란, 건국세력이나 산업화세력이 그간에 행사하고 있었던 권위주의(權威主義)를 청산하고, 제헌헌법이 법제화한 자유민주주의로 돌아가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는 민주화세력은 건국세력이나 산업화세력과 상이한 정치체제를 추구하는 세력이 아니라 동일한 정치체제내의 상이한 정치적 분파(分派)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면 건국세력이나 산업화세력은, 왜 한편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체제로 제도화하거나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권위주의를 행사(行使)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그 원인은 한국 근현대사회가 걸을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근대화의 길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진제국의 근대화는 자생적 전개과정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역사적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선진국에서도 때로는 역사발전의 반전(反轉)이 있기는 했지만, 한 번 달성된 역사적 성취는 후퇴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저개발국에서는 여러 가지 여건이 미비한 상황 속에서 근대화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곳에서는 선진국의 정치제도를 우선 도입하고 그 이후에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저개발국의 근대화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목표와 현실 간에 모순을 일으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도입한 선진제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것과는 모순되는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권위주의하에서는 상호 모순되는 제도들이 동거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해놓고 동시에 이와 모순되는 반공주의를 도입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장기집권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중산층의 미성숙을 고려하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한국사적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박정희의 장기집권은 더구나 그러하였다. 그는 분명하게 ‘조국 근대화’라는 목표를 내걸어 놓고, 유신체제를 공공연하게 밀고 나갔다.

    다시 말하면, 이승만과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와 경제발전을 위하여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설명은 결과를 가지고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비판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 및 경제발전과 권위주의체제가 밀접한 상호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시기의 반공주의가 없었더라면, 과연 대한민국은 수호될 수 있었을까.

    이승만은 그 어려운 정치적 여건 속에서도 농지개혁과 귀속재산의 불하로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적자재정 속에서도 교육 투자에 중점을 두어 한국의 근대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따라서 4.19학생의거도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확립과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의 결과 가능했던 측면도 있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권위주의는 정말로 목적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근대경제사를 전공하는 필자의 눈으로 볼 때, 경제개발계획에 의한 경제 발전은 정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한 것’이라 할 만하다.

    박정희가 이어받은 한국경제는 농업사회일 뿐만이 아니라, 도저히 국가를 유지할 수 없는 무역과 재정의 심각한 적자상태 하에 있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정서는 즉각적인 자립경제의 실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요구와 역행(逆行)하면서 한국경제를 외자도입과 수출지향 공업화정책으로써 우회적으로 자립경제를 달성한 것은 진실로 혁멱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박정희의 권위주의를 단순한 장기집권의 수단으로 평가절하 할 수는 없다.

    87년의 민주화는 이승만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과, 박정희에 의한 경제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87년의 민주화는 전두환의 ‘자유주의정책’에 의한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의 한국경제의 질적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물론 87년의 민주화는 민주화운동이 쟁취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이 87년의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권위주의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조건이 성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회복’이 민주화운동의 목표였다면, 87년의 민주화로 민주화운동의 목표는 이미 달성된 것이다. 현행의 헌법에는 여러 가지의 미비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이미 훌륭한 민주주의 헌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진영 10년간의 집권하에서도 현행의 헌법으로서 만족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진보진영 내에서는 다른 한편에서 제대로 된 민주화가 달성되지 않았다는 불만의 소리가 꾸준히 있어왔다. 이러한 불만은 아마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어떤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 좌익적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이다.

    한국의 전통적 좌익이 실현하고자 했던 민주주의는 신(新)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였다.

    그런데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달성된 동구(東歐)나 아시아 제국에서는 정치체제로서 독재가 있었을 뿐,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본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좌익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하여 불만하면서도 그들 나름의 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볼때 좌익적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밖에 없다. 한국의 좌익들이 사회민주주의로 썩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아직도 어떤 혁명이 가능하리라고 기대되던 전기 산업사회에서 정체(停滯)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보수가 이끌어 왔고 지금도 이끌고 있다'는 이 책의 캐치프레이즈는 확실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보수가 이끄는 한국 민주주의가 선진국의 민주주의와 같은 수준 높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정치에 있어서는 진보 쪽이 실현하고자하는 민주주의가 불투명하면, 보수 쪽의 민주주의도 그 수준이 낮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의 정치발전을 위해서는 진보쪽이 추구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상(像)이 하루 빨리 정립되어야 한다. 혁명이 불가능한 후기 산업사회에서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일 수 밖에 없다.

    만약 한국의 진보가 실현하고자 하는 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로 수렴(收斂)하게 되면, 한국 선진화의 미래는 밝다.

    진보가 사회민주주의로 수렴하는 과정은 한국의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이며, 한국의 정치가 자유주의를 토대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간의 경쟁과 협력의 장(場)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러한 상황이 실현된다면, 한국의 진보는 지금과 같이 문제제기 세력으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양대 축(軸)의 하나로 발전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자유민주주의의 한층 높은 발전을 위하여 한국 민주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살펴 보았다. 여러 사람들의 논물은 편집한 것이라 일정한 체계를 가진 저서는 못되지만, 각 논문들은 그 나름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보수 쪽도 어떠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독자 제현(諸賢)의 기탄없는 질정(叱正)을 바라마지 않는다.
                                        2011년 5월 시대정신 이사장 안 병 직(安秉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