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정몽준 한나라당 전 대표
  •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라는 영화가 있다. 이상주의적인 스미스 상원의원으로 분한 왕년의 명배우 지미 스튜어트가 부패하고 타락한 상원의 다수결 의사진행에 맞서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끝없이 낭독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담고 있다.

    ‘필리버스터’라는 미국 상원 특유의 제도를 일반 대중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시킨 명장면이다. 그 이후로 필리버스터는 곧잘 다수의 횡포에 맞서는 의롭고 외로운 의원의 용기 있는 행위의 전형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 제도가 우리 의회에도 곧 도입될 모양이다. 국회폭력 방지의 차원에서 말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EU FTA 비준안 처리 문제를 계기로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일부 여야의원 들이 동의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리 국회에서는 쟁점 의안에 대해 야당이 물리적으로 저지하면 여당 또한 물리적으로 돌파하는 일이 관행화되다시피 했다. 이는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음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치의 미숙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행태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회폭력을 없애야 한다는데 반대하는 의원은 한 명도 없다. 어느 의원이라고 몸싸움하기 좋아하겠는가? 일부 여당의원이 물리력을 동원한 법안 통과에는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다분히 여론을 의식한 과시용일 뿐만 아니라 마치 동료 여당의원들을 폭력을 즐기는 사람들로 매도하는 듯하여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더구나 국회폭력의 문제를 그 발생 원인은 제쳐두고 법을 통하여 그 현상만 고치겠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이는 마치 전쟁의 근본 원인은 없앨 생각을 하지 않고 ‘전쟁 방지법’이라는 국제법을 만들면 전쟁이 사라질 것으로 믿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필리버스터제는 미국 상원의 오랜 관행으로 다수에 의한 법안 상정을 소수가 합법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제도다. 한 의원이 발언권을 얻으면 그 발언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의 의사 진행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든 전화번호부나 요리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끊임없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더라도 의사 진행 규정에 위반되는 행위만 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러나 필리버스터 제도의 원조 격인 미국 의회 내에서도 이 제도의 비합리성과 국정 운영에 미치는 해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다. 미 상원의 노련한 정객이었던 월터 몬데일 (Walter Mondale) 전 부통령은 올해 1월 1일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필리버스터를 뜯어고쳐라” 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현행 제도가 오늘의 정파적이고 교착상태에 빠지는 상원에는 부적합하다”고 하였다. 그는 “오늘날 우리나라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예산 적자, 고실업률, 두 개의 전쟁. 따라서 이러한 시급한 사안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제대로 작동하는 입법부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현재 필리버스터를 끝내기 위한 정족수를 전체 상원의원 100명 중 60명에서 55명으로 줄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선거라는 제도 자체가 다수결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만일 선거에서 패배한 소수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다수와 소수의 ‘합의’에 의해서만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우기기 시작한다면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국회란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선출된 국민의 대의원들이 다수결의 원칙에 입각해서 나라의 법과 정책을 결정하도록 만들어진 기구다. 국회가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이유는 행정부나 사법부와는 달리 모든 의사결정과정을 철저하게 다수결 원칙에 입각하여 진행하기 때문이다.

    우려되는 것은 국회에서 다수결 원칙 자체에 대한 존중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필리버스터 제도가 도입된다는 사실이다. 소수당에 의해 자행되는 물리적인 의사 진행 방해는 그 자체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부정하는 행위다. 소수당이 원하지 않는 법안이라고 하여 물리적으로 의사 진행을 막는 한편, ‘여야 합의’를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하는 행위다.

    필리버스터 제도는 일종의 초(超)다수결(Super Majority) 제도다.  다수결 원칙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합의조차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고착화 되어가고 있는 국회의 무기력함과 반복되는 마비 상태를 합리화시키고 제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수결 원칙은 소수당의 입장에서 볼 때 냉혹하고 때로는 억울하게 느껴지는 제도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고 있고 한국 민주주의가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수당과 소수당은 수시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일부여당 의원이 필리버스터 제도도입에 적극적인 이유가 앞으로 야당이 될 준비를 미리 해 두고자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정당 정치와 국회의 발전과 성숙은 장기적인 안목에 기반한 다수결 원칙의 철저한 준행을 통하여서만 보장된다. 이를 저해하는 제도의 도입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국회폭력을 막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모양에만 너무 신경쓰다 보면 자칫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