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정치 실현을 위해서는 공민의식 발전 필요실패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정의사회’ 실현에 걸림돌
  •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우리 사회에 과연 정의가 존재하고 있는지, 만약 제 기능을 못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서울대 국민윤리교육학과 박효종 교수에게 물었다.


    선진화 홍보대사(이하 <선>) 현재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는 선거제도는 최대 다수의 최대 만족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선거제도 아래에서는 투표결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소수 의견은 반영하지 못 한 채 최대다수가 만족하는 선택만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중우정치와 같이 다수결 원칙이 악용될 여지도 있다고 봅니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정의로운 정치를 구현하고자 할 때 다수결 원칙에 의한 선거제도가 최선의 방법인지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박효종 교수(이하 <박>) 다수라고 해서 옳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결은 공동체가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만장일치가 이루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다수의 의견과 소수의 의견이 나누어지게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만장일치가 되기는 어렵죠. 만약 만장일치를 의사결정 원칙으로 정하면, 토의와 심의를 통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모을 때 이를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도 사회적 비용이라고 봐야 합니다. 또한 몇 시간, 하루 종일 이야기 한다고 해도 의견 일치가 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만장일치의 이상은 좋지만, 만장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드는 비용을 고려해야 합니다.

    만장일치를 이룬다면 마음이 상하는 사람은 없을 수 있습니다. 즉, 부정적 외부효과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만장일치를 하는데 드는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 너무나 큽니다. 다수결 원칙을 따를 때는 부정적 외부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수와 소수가 있고, 소수는 마음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반면, 거래비용은 비교적 작습니다.

    세계는 왜 이런 공리주의적 원칙을 담은 다수결 원칙을 쓰고 있을까요. 1인 1표라는 평등주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장일치의 경우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렇다면 모두가 동의하는데 반대하는 그 한 사람 표의 가치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표와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큰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소수 의견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수와 다수는 옳고 그름을 나누는 잣대로 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니듯이 소수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의견이 옳지 않아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처럼 민주사회에서 다수결 원칙을 쓰는 것은 개인의 평등성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수결 원칙은 그나마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 우리나라의 정치는 흔히 ‘하향식’이라고 합니다. 이는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내놓고 국민들을 이에 동원하는 정치 과정으로 들립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요구가 정부에 전달되기는 힘듭니다. 때문인지 투표율로 나타나는 국민의 정치 참여율은 매우 저조한 상태입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는 정의로운 정치 구조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 국민들의 정치 참여 수준을 높이기 위한 방안에는 어떤 게 있습니까.

  • <박>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은 바로 ‘시민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최근 들어 ‘참여 민주주의’라 하여 시민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시민단체들을 통해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하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리당략을 토대로 행동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시민들의 시민의식, 혹은 소명의식이라 할 수 있는 ‘공민(公民)의식’을 제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혐오시설기피현상, 즉 님비(NIMBY) 현상은 우리의 공민 의식을 잘 말해주는 것이죠. 그러니 정의로운 정치 구조로 한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권자인 시민 스스로가 사익만을 탐하지 않고 공익을 고려하는 의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대표자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가 아니라, ‘대표자가 공동체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를 먼저 고려하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참여민주주의라 해서 단순한 참여만으로는 원활히 굴러갈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참여 중에서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참여가 절실합니다. 사리사욕을 따지지 않는 순수한 정신에서 기인한 참여, 참된 정신에서 우러나온 참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학교가 공민 의식 교육을 실시하고 참된 시민을 길러내는 데 노력하고 앞장선다면 정의로운 정치 구조를 구현하고 국민들의 정치 참여 수준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선>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나라는 한편으로 개인들의 자유나 사회 정의와 같은 필수적인 개념들을 간과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와 같은 결과 중심적 사고가 만연한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결과 중심적 의사결정이 가장 빈번히 통용되는 분야는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 이러한 경향을 바꾸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박> 우리 정치사회의 현실에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질문이네요. 과거의 우리사회는 헝그리(Hungry) 사회였습니다. 배고픈 사회에서의 목표의식은 어떻게 해서든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그동안 앞만 보고 경제성장을 이루어 부를 증대하고, 수출을 증대하는데 힘썼죠. 덕분에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발전을 이룬 전례가 없을 정도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 앞만 보고 나아가는 바람에 과정, 규칙, 공정성 등에 소홀하게 되는 문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헝그리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탈락한, 또는 탈락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분노가 모인, 앵그리(Angry) 사회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화’라는 것은 억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더 열심히 노력했는데, 저 친구는 왜 잘 살고 나의 형편은 이러한가에 대한 억울함입니다. 이는 과정의 공정성이 아직 사회 규범으로 자리 잡지 못해 생긴 사회분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공정성이 무엇인지, 누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도 평가 받을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죠. 공정한 사회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결과와 과정을 이야기 할 때 우리 사회에서는 결과가 너무 중시되고 있기 때문에 과정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기회(과정)의 평등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결과도 어느 정도 고려해서 생각해야 한답니다. 여기서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패자 부활전의 기회가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로 이어지도록 사회가 낙인을 찍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시장이든 사업이든 한 번 실패를 했더라도 영원한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또한, 패자부활전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승패에 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기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예 참가하지 말아야 하는데, 경기에 참가하지 않을 수도 없고, 자신이 패배한 후에도 공정성을 탓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결과를 받아들일 때 승리는 쉽게 받아들이면서 패배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너무 인색한 심리가 팽배해 있습니다.

    물론 결과보다 과정의 공정성으로 평가 받는 사회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과정의 공정성은 최대한 투명하게 평가하려고 해도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현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 풍토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결과 만능주의를 버리고 노력, 과정도 평가 받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야 합니다.

    <선> 노무현 정부 시절 2%의 부자에게 세금을 거둬 98%의 국민을 위해 쓰겠다면서 종합부동산세 신설과 양도소득세 중과라는 ‘세금 폭탄’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였지만 현재 야당에서는 그와 비슷한 논리로 ‘무상(無償) 복지 시리즈’의 재원 마련을 위해 ‘부자 증세(增稅)’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시장 경제에 자유로운 선택으로 부를 얻은 자로부터 부를 '빼앗아서' 재분배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정의'의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생각하면 여러 주장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교수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박> ‘울피아누스’라는 로마의 법학자는 정의를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리려는 항구적 의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그의 몫’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요즘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차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는 ‘타고난 재주’, 혹은 ‘운’에 의해 축적한 부의 소유는 ‘출발선상에서의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요즘 논쟁의 중심에 있는 ‘보편적 복지’의 핵심적인 사상은 ‘필요한 부분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에 의해 필요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주장만 살펴봐도 ‘그의 몫’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분배에 대한 정답은 존재하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 분배 방법인지 생각해 보기 이전에 그 방법이 현실적으로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효과가 없다면 분배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2% 부유층에게 세금을 거둬서 98%를 커버하겠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할 때 재원 마련 방안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부자 증세’만으로는 ‘무상 복지 시리즈’의 재원 마련이 어려우므로 그러한 분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 얼마 전 외교부 장관의 딸이 해당 부처에 특채된 사실이 드러나 사회에 큰 파장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편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뒷바라지 해줄 재산과 배경이 있는 부모를 가진 소위 ‘취업 로열층’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 둘만 살펴보아도 요즘 모두가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중산층 혹은 빈곤층에게는 굉장한 박탈감을 줄 수 있으므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출발 선상을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와 그 실천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원칙과 기본정신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과거에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플라톤은 모두의 출발선상을 맞추기 위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 아빠와 떨어뜨려 놓고 공동으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출발선상은 맞출 수 있지만 부모에게 사랑 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대단히 비인간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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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출발점을 맞추는 것이 유일한 가치인지 둘째로 그것이 최우선의 가치냐 하는 것입니다. 가치에는 출발선상을 맞추는 것 외에도 자유나 자율, 창의 등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며 출발선상을 맞추는 것이 이것들에 우선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에서 진정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도 고민해 봐야 합니다.

    또 카를 포퍼의 ‘사회개조론(Social Engineering)’을 살펴보면 제도를 가지고 평등을 만들려고 했을 때 항상 사각지대가 존재했고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제도에 의해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 노력을 먼저 활성화시키고 바꿔야 하는 것을 선행한 뒤 제도를 바꿔야 합니다.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봉사 활동 등도 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뷰 후기>

    2500년 전 로마의 법학자 울피아누스는 ‘정의’의 개념을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리려는 항구적 의지’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그의 몫’이란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 ‘인간이 채우고자 하는 욕구’였고 이것이 ‘평등하게’가 아니라 ‘올바르게’ 분배되는 것이 ‘사회정의’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이 개념에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꾸준한 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내렸다. 

    인터뷰 진행: 선진화 홍보대사 김시원, 김혜진, 설지원, 이수정, 이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