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직속위 조사…"태평양전쟁 말기 공사에 강제동원""매일 한명이상 사망, 자살도 속출"
  •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총 지휘소로 쓰일 계획이었던 대본영 지하방공호 건설에 한인 7천명 가량이 동원됐으며 이들 가운데 공사 과정에서 많게는 650명이 사망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국무총리 직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일본 국토교통성 자료와 문헌, 관련자 진술, 기존 연구자료 등을 토대로 2006년부터 조사를 진행한 결과, 피해 규모가 이같이 추산됐다고 28일 밝혔다.

    대본영 지하방공호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ㆍ해ㆍ공군 지휘부가 주둔해 전쟁을 지휘ㆍ통솔할 수 있도록 한 본부이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일왕 일족의 왕궁까지 옮겨놓은 대피시설이었다.
    당시 일본은 나가노(長野)현 마쓰시로(松代) 일대 쇼산(象山), 마이즈루산(舞鶴山), 미나카미산(皆神山) 등을 중심으로 1944년 10월~1945년 패전 직전까지 극비리에 공사를 진행했다.
    규모는 굴착 길이 9천510m, 높이 2~3m, 면적 3만8천42㎡였으며 패전 당시 평균 공정률은 80~90%였고 병력이 주둔하기 전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실제 활용되지는 못했다고 위원회는 전했다.

    위원회는 "전쟁 말기 일왕이 대다수 국민을 사지에 버려둔 채 일족 안위만 지키려 건설한 장소로 추정된다"며 "공사 비용은 당시 금액으로 1억엔에 이르며 정부 관청과 방송협회, 식량저장고 등까지 포함돼 규모도 엄청났다"고 말했다.
    위원회가 확보한 생존자 등 진술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에서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무작위로 주민을 강제동원해 일본으로 보냈으며 동원된 한인들은 반지하 목재 막사에서 생활하는 등 열악한 조건 속에 1일 2교대로 공사에 투입됐다.
    당시 한인 노무자들은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혹한에서 버텨야 했고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굴착과 발파공사가 이뤄지는 가운데 일본 측이 촉박한 공사 기일을 맞추고자 작업을 무리하게 강행하면서 위험에 그대로 노출됐다.
    위원회는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공사 기간 사망자가 매일 1명 이상 나왔고 고된 노역과 공포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경우도 빈발했다"며 "식사 시간은 30분이었고 취사장에서는 서서 밥을 먹어야 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한인 강제동원의 구체적 실태를 파악하려면 작업 명부를 입수하고 작업장과 한인 사망 장소, 매장지 등에 대한 현지 조사를 해야 한다"며 "일본 측이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관계 부처와 계속해서 접촉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