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중심세력 ‘무슬림 형제단(MB)’ 집권 가능성 높아美 등 서방국가 ‘무바라크 물러나도 MB집권은 안 돼’韓-이집트 교역량은 적으나 수에즈 운하 봉쇄되면 치명타
  • 이집트 반정부 시위를 바라보는 서방국가의 위기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시위의 중심에 ‘무슬림 형제단’이 있어서다. 때문에 서방국가들은 ‘포스트 무바라크’로 앨바라데이 前 IAEA 사무총장이 선출되길 희망하고 있다.

    이집트 反정부시위 경과

    지난 1월 25일부터 시작된 이집트 반정부 시위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세력들은 ‘100만 인 행진의 날’을 준비하는 등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 벌이고 있다.
     
    시위가 점점 커지자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했다. 이 일로 지금까지 수천 명이 체포되고 100여 명 이상의 시위대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시위대 사망 소식은 군이 현 무바라크 정권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군은 ‘우리 군은 지금까지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눈 적이 없다’며 정부와 시위대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 ▲ 경찰이 쏜 총에 맞은 부상자를 시위대가 옮기고 있다.ⓒ
    ▲ 경찰이 쏜 총에 맞은 부상자를 시위대가 옮기고 있다.ⓒ

    여론이 들끓는 것을 막기 위해 인터넷마저 차단했던 무바라크 대통령은 결국 ‘다음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발표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적인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 일부 親무바라크 시위대가 나서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유혈충돌만 일어났을 뿐 대세를 바꾸지는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이집트 반정부 시위의 배경에 대해 사람들은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된 무바라크 정부의 독재행위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과격 이슬람 조직이 한 몫을 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s, MB라고도 함)은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이집트를 독립시켜주지 않자 시작된 시위로부터 탄생했다. 무슬림 형제단의 창설자 ‘하산 알 반나’는 이집트 독립 시위에 참여하면서 당시 터키의 케말 파샤 등과 같은 세속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 이론이나 제도가 건전한 이슬람 사회 건설을 방해하고 사회를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산 알 반나는 이런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에 반기를 들어 ‘와하비즘’과 같은, 순수 이슬람으로의 복귀만이 무슬림 사회의 정화와 발전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1928년 ‘꾸란’과 ‘하디스’만을 믿고 따른다는 ‘무슬림 형제단’을 창설했다.

    하산 알 반나가 만든 ‘무슬림 형제단’은 ‘이븐 한발’, ‘이븐 하즘’ ‘안 나와위’ ‘이븐 타이미야’ ‘이븐 압둘 와합’ 등 이슬람 원리주의 주창자들이 정립한 사상과 행동을 교본으로 삼았다. 무슬림 형제단은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이집트에서 가장 큰 단체로 발전했다.

  • ▲ 무슬림 형제단은 지난 70년 동안 이스라엘과 타협하고 서방국가와 협력하는 이집트 정부에 반발해 왔다.ⓒ
    ▲ 무슬림 형제단은 지난 70년 동안 이스라엘과 타협하고 서방국가와 협력하는 이집트 정부에 반발해 왔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후에도 反영국, 反정부적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1950년대 초 수에즈 운하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고, 서양인들 소유의 건물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의 근대적 발전을 이끈 나세르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4년 암살에 실패한 뒤 나세르에 의해 조직이 철저히 무너졌다. 나세르는 한편으로는 이들의 요구를 다수 수용해 ‘범아랍주의’와 ‘민족사회주의’ 정책을 펼쳐 지지세력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1964년 나세르는 대사면을 통해 무슬림 형제단 관계자들을 대거 석방하며 유화정책을 폈다.

    하지만 ‘세속 정치’와 무슬림 형제단과의 관계는 좁혀지지 않았다. 무슬림 형제단이 원하는 것은 종교 교리로 통치되는 국가였던 반면 이집트 ‘세속 정치’는 범아람주의와 사회주의 정책을 통해 중동 패권을 장악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다. 특히 1970년대 사다트 대통령 집권 중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무슬림 형제단은 이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과 손을 잡고 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부터 집권하고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 또한 사다트 정권의 맥을 잇다 보니 무슬림 형제단과의 관계가 좋을 수 없었다. 즉 이번 반정부 시위는 70년 이상 이어진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아랍 민족주의자 간의 해묵은 권력 투쟁이 불거진 것이다.

    포스트 무바라크는 누구

    ‘분노의 날’ 이후 지금까지 반정부 시위의 전개양상을 보면 이번 싸움은 무슬림 형제단의 승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슬림 형제단이 그 승리를 이어나가 차기 정권을 만들어낼 경우 서방국가들은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우선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 근본주의 사회건설을 희망하는 세력이다. 이들이 집권하면 최악의 경우 ‘제2의 이란’이 될 가능성도 있다. 즉 무슬림 형제단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면 기존의 헌법이나 민주주의적 제도는 모두 폐기되고 종교가 모든 것의 상위에 서게 된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이 파기될 수도 있고, 수에즈 운하의 운영 또한 ‘종교적 이유’에 의해 이상하게 변할 수 있다.

    이집트가 종교국가로 변할 경우에는 주변 북아프리카 국가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위키리크스 폭로로 시위가 일어났던 튀니지나 알제리 등에서도 종교 근본주의 세력들이 수면 위로 부상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서방국가들은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국가들과의 투자, 교역 협상을 전면 재검토해야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스라엘과 교류 중이거나 미국과 친분이 깊은 나라들은 1979년 ‘이란 혁명’ 때처럼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 ▲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은 후 기념사진을 찍는 시위대. 이란 혁명이 오버랩된다.ⓒ
    ▲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은 후 기념사진을 찍는 시위대. 이란 혁명이 오버랩된다.ⓒ

    이런 이유로 현재 서방국가들은 ‘포스트 무바라크’로 앨바라데이 前 IAEA 사무총장을 밀고 있다. 앨바라데이 前사무총장이라면 무슬림의 요구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서방국가와 정면대결 양상을 만들지 않으면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상황을 진정시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여기다 그가 핵확산억제를 위해 활동했던 만큼 무슬림 사회의 ‘핵 성전’ 또한 자제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집트發 오일쇼크'

    하지만 서방국가들이 앨바라데이 前사무총장에 대해 너무 자주 언급하면서 지난 며칠 사이 그의 인기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현지 소식이 나오고 있다. 서방 세력을 ‘제국주의자’ ‘악마’라고 생각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시각에서는 서방 국가가 앨바라데이를 지지하는 것이 오히려 악영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앨바라데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커질 경우 이집트는 물론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 수립이 도미노처럼 생길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오바마 美대통령을 비롯한 서방 정상들은 수시로 통화를 하며 이집트 정정(政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스라엘 또한 마찬가지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나라도 이 같은 이집트의 변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나라와 이집트 간의 교역량은 연간 10억 달러 미만이지만 우리나라 무역 물량의 30% 이상이 수에즈 운하를 거치고 있어 만약 이집트 정정 불안으로 수에즈 운하가 봉쇄될 경우에는 치명타를 입기 때문이다. 여기다 북아프리카 국가들까지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설 경우에는 건설업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이집트 發 오일쇼크’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때문에 현재 지식경제부 등 정부부처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방안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북미나 동아시아,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한 탓에 뾰족한 대응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어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