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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니다 보면 우리 강산이 참 아름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산세는 수려하고 강물은 굽이지며 다정하게 흐른다. 그 강과 산에 기대어 어린 시절을 보낸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향의 하천에서 물놀이 하던 유년의 기억은 현재의 고단함을 버텨내는 힘이 된다. 우리의 아이들도 그런 힘을 가지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고향 대구에 흐르는 강으로는 금호강이 가장 컸고, 그 지류인 방천은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하천이었다. 어린 시절 여름이면 방천에 나가 물놀이를 즐기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에어컨이 없던 그 시절 아이들에게 방천은 천혜의 놀이터 겸 피서지였다. 친구들과 멱을 감고 고기를 잡으며 하루 종일 놀다 보면 그 뜨거운 대구의 무더위도 순간 잊혀졌다. 방천 물에 들어가는 것이 좀 차갑게 느껴지면 어느새 여름은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방천은 사람이 빠져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깊었다. 홍수나 태풍 때는 불어나는 물 구경을 하느라 천변에서 하루를 온통 보낸 적도 흔했다. 그런데 그 많던 물이 사라졌다.
방천의 물이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무심하게 방천을 바라보는데 물이 어른의 발목에 겨우 닿을 정도로 얕았다. 평범한 학생의 생각으로는 강물은 바다로, 바닷물은 증발해 다시 비와 안개 등으로 땅으로 강으로 흐르면서 윤회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많던 방천의 물은 어디로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 말인가. 당황스러웠다. 그때의 충격은 컸지만 게으른 탓에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굶주림에서 벗어나 고기나 밥으로 배를 채운 만큼, 산업화를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이용한 만큼 고향의 강물이 사라져버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유년 시절 방천에서 물놀이 하며 즐겁게 놀던 기억은 지금도 힘들고 어려울 때 꺼내 보며 위안을 삼는 추억 조각들이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의 아이들보다 훨씬 멋진 환경 속에서 행복한 유년을 보냈구나 생각이 든다. 지금의 아이들은 흙 한번 제대로 밟지 못하고 강물 속에 풍덩 들어가는 일도 쉽지 않은 채 매연과 시멘트 조립물 환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 다음 세대 아이들은 또 어떻게 될까. 중년이 되어가는 나는 여전히, 아니 더욱더 간절하게 방천에서의 나날을 되새기며 그 힘으로 버티며 살아가는데 지금 아이들, 다음의 아이들에게 그러한 자연이 허락되기는 할 것인가.
다가올 미래는 사람간의 관계가 더욱 메마르고 건조해질 것이다. 그럴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일 것이다. 유년 시절 자연과 더불어 지냈던 ‘자연스러움’이 인간다움의 기반이 될 것이다. 내가 지금도 방천과 함께 지낸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들 때 슬며시 미소를 띠듯, 우리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서영석 /극작가·연극연출가 /극단 ‘예천’ 대표, ‘얼라리오’ 등 10여 편의 연극 연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