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가까운 보문단지의 한 호텔에서 자고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로 일행이 여러 명 그 호텔에서 투숙하였습니다. 1979년 10·26 새벽, ‘불국사의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토함산의 가을 공기는 무척 차가웠고 주변이 차차 뒤숭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라디오를 통해 청취된 정보는 오직 하나 - ‘대통령 유고’ 그 한 마디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내용과 진상을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뒤에야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꼭 31년 전 오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의 투사라는 사람들이 죽은 박 대통령의 시체와 관을 차지하지 못하고 유신의 잔당들과 신군부가 도맡아 그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으므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왔다고 자부하던 사이비 ‘투사들’은 그만 밀려나고 대한민국의 실권은 군부에서 또 다시 군부로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새로 등장한 군부는 신군부로서, 박 대통령에게만은 충성심이 있었지만 김종필·이후락 씨 등 유신의 2인자 3인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묵살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합니다. 12·12 사태가 벌어졌고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장군의 모습이 눈에 뜨이게 되었습니다.

    80년 초의 정국이 불안하던 차에 학생 데모가 연일 이어지며 격화되다가 승리를 잡은 듯 국보위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라남도 광주의 무기고가 시위대에 의해 탈취되는 5·18의 참극이 벌어졌고 그 진압 과정은 도가 지나쳤다는 원성이 터져 나올 만큼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하기야 그런 ‘폭동’을 방치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혼란과 무질서로 뒤범벅이 되어 인민군의 새로운 남침의 기회를 마련할 것이라고 신군부가 판단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군부가 위기에 처하여 상대하고 의논할 만한 민주세력이 없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비극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겁니다. 4·19 때에는 허정 씨가 있어서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하와이에 망명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장면 씨의 민주당 정권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허정 씨가 5·16 때에도 박정희 장군과 타협할 수 있었다면 박 장군은 2선에 물러날 가능성이 컸다는 사실도 내가 압니다.

    어쨌건 우리 역사는 불행한 사건의 연속으로 이어집니다. 뒤를 이은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부처를 백담사에 유배시킴으로 김영삼 씨의 눈에는 그 군부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두 사람을 다 감옥에 보낼 수 있었고, 장성들의 별을 아마 수백 개 그 손으로 군복에서 떼어버렸을 것입니다. 군부의 집권을 두 번이나 막지 못한 것은 자칭 ‘민주화 투사들’의 책임이라고 나는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만일 김성수·송진우, 신익희·조병옥이 살아있었다면 10·26, 5·28은 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김동길 /연세대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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