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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에서의 군사훈련은 하루에 끝났다. 하룻밤을 보낸 제23보병연대 본부 장병들은 11월 7일 점심을 일찍 먹고 사릉을 떠나 여주에 있는 영릉으로 향했다. 영릉에 도착한 것은 오후 네 시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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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주 세종대왕릉 ⓒ 자료사진
영릉에 와서 놀란 것은 광릉에 비해 경내가 너무도 초라하다는 것이었다. 광릉입구로부터 들어가는 길 양쪽에는 수백년 수령의 아름드리 전나무나 소나무들이 싱싱하게 하늘에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영릉에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겨우 몇 십년 수령의 소나무가 듬성듬성 몇 그루 서있기는 했으나, 그 소나무들마저 송충이들이 솔잎을 반쯤 갉아먹어 건강상태가 부실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왕으로 추앙을 받는 세종대왕의 능이 이지경이니, 크게 잘못된 일이며 시급히 관리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참모들에게 영릉 관리 사무소측과 협조하여 연대지휘소 천막 칠 장소를 능 입구 적당한 곳에 선정하고, 즉시 천막을 설치하라고 지시한 뒤 영릉 경내로 걸어 들어갔다. 봉분 앞에 서서 동방의 요순(堯舜)으로 불리는 우리의 성왕 세종대왕을 경건한 마음으로 우러러 추모하면서 경배하였다.
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심으로써 우리 겨레는 언어생활과 일치하는 정상적인 언어 문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배우기가 아주 쉬운 글자여서 만백성은 문맹으로부터 쉽게 해방될 수가 있었다. 그로 인해 나라 문명 발전에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 겨레의 자주정신을 일깨워 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때는 겨레의 지도층들이 중국을 절대적으로 숭상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도취되어 있어 심지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같은 사람까지도 훈민정음 창제반대 상소문을 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드셔서 반포하셨다.
명석한 두뇌,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군의 덕,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뛰어난 선견지명, 일단 목표를 설정하면 이를 이룩하기 위해 성취·창안하시는 뛰어난 창의력, 겨레를 위하여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면 밀고나가는 강력한 추진력, 인재를 발굴 양성하면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중지를 모으면서 이끌고 나가는 넓은 포용력과 통솔력,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 옛 성현으로부터 배우는 ‘치세의요’(治世之要) 탐색력과 그 근면성, 이런 장점을 구비하신 분이 바로 세종대왕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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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민정음 ⓒ 연합뉴스
세종대왕하면 누구나가 훈민정음을 떠올린다. 그만큼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유명하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못지않은 여러 가지 치적을 남기셨다. 대왕은 집현전을 확충, 대궐 안에 설치했다. 인재를 양성하여 다각적인 연구를 시켜 역사, 지리, 정치, 경제, 군사, 도덕, 예의, 천문, 의약, 어학, 문학, 운학(韻學), 종교, 농업, 음악 등에 관한 서적을 간행했다. 이와 동시에 주자소를 설치하여 인쇄술을 개발, 종래에 비해 수십 배의 인쇄능률을 올리게 했다. 이리하여 조선왕조의 황금시대를 전개하였다.
대왕은 군사력 증강, 국토 확장에도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다. 군사적 불후의 업적은 사군(四郡) 설치와 육진(六鎭) 설치의 국토 회복 확장에 있었다. 동북지방은 조선국 개국의 태동지로 중요시 되었으나, 여진족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남하한 일이 있으며, 배달민족은 이들과 함길도에서 오랫동안 각축전을 벌여온 사이였다. 세종 15년 12월, 세종대왕은 함길도 도절제사로 김종서를 임명하였다. 김종서는 두만강 유역을 돌아본 후, 육진설치를 대왕에게 건의하고 성을 쌓기로 했다. 여진족이 언제라도 쉽게 습격할 수 있는 넓은 곳에 새로 성채 위치를 결정하고 축성한다는 것은, 당시의 가용인력과 여진족 세력을 고려할 때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김종서가 우선 네진(四鎭)을 설치하려 할 때 조정에서의 의논은 분분하였다. 일부에서는 “김종서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벌여놓았으니, 그 죄는 죽여야 옳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비록 내가 있으나 만일 김종서가 없었더라면 이 일을 족히 할 수 없을 것이요, 비록 김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었더라면 족히 이 일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다”하고는 육진설치 결정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김종서는 각 진에 함길도 백성을 1천 100호씩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함길도 인력으로는 부족해서 임금께 건의하여 세종 23년(서기 1441년)에는 경상도에서 140호, 충청도에서 120호, 전라도에서 120호, 강원도에서 50호를 육진에 이주시켜 부족한 인력을 채웠다.
김종서는 축성을 하는 한편,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들을 회유해서 귀화시켜 두만강 유역을 평온하게 평정하고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위업을 달성했다. 종성·회령·경원·온성·경흥·부령의 육진을 완성한 김종서는 그동안 잘 훈련시킨 강한 군대를 각 진에 주둔시키고 서울로 돌아왔다. 세종 32년(서기 1450년) 음력 2월 17일(양력 4월 8일), 소현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동 별궁에서 세종대왕은 54세를 일기로 승하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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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 ⓒ 자료사진
이희세 의성왕 이조부 태조처럼 74세까지 사시는 수복(壽福)을 누리셨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살생부도 없었을 것이며, 정난(靖難)의 변(變)이나 병자원옥(丙子寃獄)의 참극도 없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가 기록 될 뿐이다. 그러니 운명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우러러 보는 성왕의 봉분 앞에 오래 서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감사의 경배를 올리고 돌아서서 영릉 입구에 설치 중인 군용 천막 있는 곳으로 갔다. 영릉 지역에서의 군사연습은 다음날 점심때 끝났다. 추계 군사연습이 모두 종료된 것이다. 철원군에 있는 연대주둔지를 향해 영릉을 떠난 것은 오후 1시경이었다.
연대장을 태운 군용 지프가 이천을 지나 광주를 거쳐 북상하는 동안, 길 옆 농촌에서는 도리깨로 콩 마당질을 하고 탈곡기로 벼를 터는 등 농민들이 땀 흘리며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까치도 날아다니고 초가집 닭들이 집 주변에서 한가로이 모이를 쪼아 먹고 있었다. 아주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었다. 군용 지프는 망우리 고개를 넘어 사릉 옆을 지나고 있었다. 머리를 돌려 동쪽을 바라보니, 이날도 구름과 산은 멀리 영월 땅을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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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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