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날 아침, 정기철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배낭을 맨 차림으로 정수용 앞에 섰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끝낸 후다.

    「아빠, 나 열흘쯤 나가 있을거야.」
    「응? 어디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정수용이 시선만 준채 묻는다.

    「대전에 일이 있어서.」
    그렇게만 말했더니 정수용은 시선을 돌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기철이 어제 김선옥한테서 받은 봉투를 탁자 위에 놓았다. 
    「아빠, 여기 10만원. 술 많이 마시지마. 밥은 꼭 챙겨먹고.」
    몸을 돌리면서 정기철이 한마디 붙였다.
    「내 핸폰 개통시켰으니까 일 있으면 연락해.」
    정기철이 아파트 밖으로 나왔을 때까지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시간쯤 후인 오전 11시경에 정기철은 유성의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 곳은 신축 아파트 현장으로 지금 마감 공사중이다.

    정기철의 앞에 서있는 사내는 공사 하청업체 사장인 임명호. 임명호 회사는 벽지 전문이다. 아파트 내부 공사중에서 벽지만 바르는 전문업체인 것이다.

    「짜식. 휴가중에도 돈 벌러 나오다니 신통방통하다.」
    임명호가 넓은 얼굴을 펴고 웃는다.

    정기철은 입대 전에 임명호와 서너번 같이 일해본 경험이 있다. 벽지 바르는 것도 기술이어서 정기철은 석달 동안이나 교육을 받고 이제는 기능공 축에 낀다. 그래서 일당 8만원은 받는 것이다.

    임명호가 장부를 접고나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손이 부족한 참인데 잘 왔어. 그럼 오후부터 시작하자.」

    휴가로 백령도에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임명호에게 연락을 해놓았던 참이다. 휴가 동안에 한가하게 놀 여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도 없다. 일하고 돈 버는 것이 적성에도 맞는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면서 임명호가 뒤를 따르는 정기철에게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야간 작업도 하고 있으니까 생각 있으면 끼어. 50% 할증 붙는다.」
    「하죠.」
    금방 대답한 정기철이 따라 웃었다.

    일감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차이 뿐이다.

    그 시간에 이유미는 정민화의 전화를 받는다.
    「어머, 민화가 왠일이니?」
    대뜸 그렇게 물었던 이유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슨일 있어?」

    「오빠가 왔어. 언니.」
    정민화가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언니가 전해달라고 해서.」
    「고맙다 민화야.」
    「언니, 별일 없지?」
    「응, 그럼. 맨날 그렇지 뭐.」
    「그럼 끊을게.」
    「언제 한번 만나.」
    「으응.」

    전화가 끊겼을 때 이유미는 귀에서 뗀 핸드폰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정기철과는 대학 축제 때 알게 되었는데 먼저 접근한 쪽은 이유미였다.

    일부러 무관심을 가장한 상대를 여러 번 겪은 터라 이유미는 정기철도 그 중 하나인 줄 알았다가 그것이 진짜인줄 알고 나서 다가간 케이스가 되겠다.

    그런데 갑자기 정기철이 결별을 선언하더니 군데 자원입대를 했던 것이다. 사귄지 석달 만이어서 겨우 팔짱만 끼는 사이가 되어있었는데 진도도 더딘 편이었다.

    황당해진 이유미가 정민화에게 전화를 해서 오빠가 휴가라도 나오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