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④  

     이야기를 마친 내가 머리를 들었을 때 이강은 울고 있었다.
    치켜 뜬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기숙사의 방 안이다.
    2인 1실이어서 침대가 좌우로 둘 놓여졌지만 한 개는 비었다. 학장 알렌 윌버(W. Allen Wilber)가 나에게 편의를 봐준 것이다.

    내가 건너편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이강에게 말했다.
    「저하, 그래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날 작정입니다.」
    나는 방금 국무부 화장실에서 들었던 헤이의 보좌관과 국장의 대화 내용을 말해 준 것이다.

    오후 6시쯤 되었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덮여 있었지만 우리는 저녁 식사도 잊고 이렇게 앉아있다.

    그때 의친왕 이강이 말했다.
    「이공, 나는 민씨가 죽기 전까지 궁 밖의 민가에서 굶주린 개처럼 살았습니다.」
    손등으로 얼굴을 닦은 이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내가 어렸을 때 민씨가 보낸 놈들이 내 눈앞에서 어머니를 베어 죽이는 꼴을 보았지요.」

    나는 숨을 삼켰다. 민씨는 곧 중전 민비를 말하며 이강의 어머니는 곧 귀인 장씨다. 장귀인이 민비의 질투를 피해 아들 이강과 함께 궁 밖의 민가에서 숨어 살다가 결국 살해 당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 이강은 생모가 눈앞에서 베어 죽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강의 목소리는 더 차분해졌다.
    「어머니는 나를 나뭇단 사이로 숨겨놓고는 놈들의 무자비한 칼을 받으면서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으셨소. 그러나 숨이 끊어지기 전에 딱 한마디 외치셨소.」
    「......」
    「잊지 말라!」

    갑자기 쥐어 짜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뱉아졌으므로 나는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이강이 잇사이로 뱉어낸 말이다. 그러더니 어깨를 늘어뜨린 이강이 나를 향해 웃었다. 전등 빛을 받은 이강의 웃음은 처연했다.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이 처참한 왕가의 비극은 또한 무엇인가? 그 죄업을 일으킨 중전 민비 또한 궁으로 난입한 일본 무뢰배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내가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이강이 내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잊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원수를 잊지 말라는 것으로 알았소. 그러나 민씨가 죽고 나서 바뀌었소.」
    이강이 이제는 한마디씩 힘주어 말했다.

    「무능한 왕이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오. 무능한 군주가 제 처를, 제 자식을, 제 백성을, 제 왕국을 이렇게 거덜을 낸 것이란 말씀이오. 어머니는 그것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이오.」
    「저하.」

    마침내 내가 손까지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지금 이강은 자신의 생부인 고종 황제를 규탄하고 있다. 동의하고 공감하지만 왠지 안타깝고 안쓰럽다.

    내가 말을 이었다.
    「저하, 부디 고국에 돌아가시면 몸을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황태자 이척은 나보다 세 살 위지만 과연 몇 해나 왕좌에 앉게 될 것인가?」

    혼잣소리처럼 말한 이강이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황제가 기를 쓰고 왕실만은 지키려고 하지만 어림없소. 대한제국은 곧 망하오.」
    그리고는 이강이 나를 응시했다. 다시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나는 의병을 일으켜 싸울 것이오. 그리고는 대한제국을 공화국으로 만들어 놓고 죽을 것이오.」

    이것이 의친왕 이강의 본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