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①  

     김윤정이 나를 불렀을 때는 헤리스의 파티에 참석한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내 은신처를 알지 못한 터라 대한제국 공사관의 법률 고문이며 조지 워싱턴대 총장인 찰스 니덤(Charles Needham)을 통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김윤정은 내가 니덤을 자주 찾아가 조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

    공사관의 1층 회의실에서 만난 김윤정의 표정은 밝다.
    「이공, 기뻐하실 일이 있습니다.」

    앞쪽에 앉은 김윤정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일본대사관의 아카마쓰 영사하고도 합의가 된 일입니다만.」
    「뭘 말입니까?」

    내가 묻자 김윤정은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의 밀서를 헤이 국무장관께 전달하는 일을 적극 돕겠습니다.」
    「아니, 그것을 아카마쓰씨하고 합의를 했다는 겁니까?」

    내가 정색하고 물었더니 김윤정의 웃음이 쓴웃음으로 바뀌어졌다.
    「저하고 아카마쓰 영사가 적극 도와드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독립회원 회원 둘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김윤정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나를 암살하려고 했지 않은가? 아카마쓰가 작전을 철회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죽어 묻혔을지도 모른다.

    그때 김윤정이 말을 이었다.
    「이것은 아카마쓰 영사가 먼저 제의해 온 일입니다. 아카마쓰 영사는 이공께서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
    「그리고 주미 일본대사관 측에서는 이공이 워싱턴에 도착하시기 전에 이미 이공의 임무를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
    「저를 의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폐하의 밀서를 국무장관에게 전해드리는 것이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루즈벨트 대통령도 만날 겁니다.」
    「도와 드릴테니까 믿어 주시지요.」

    김윤정이 정색하고 말했으므로 이번에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김윤정이 적극적인 자세가 된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아카마쓰씨가 일본을 배신하고 우리를 돕는다는 것입니까?」
    「아카마쓰씨는 백제계 일본인입니다. 우리에게 호의적이지요. 그러나,」

    그러더니 김윤정이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말을 잇는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이제 일본의 외교 고문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쯤은 눈 감아줘도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황제의 밀서 따위로 상황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본 측의 자신감일 수도 있다.
    아카마쓰는 결코 일본을 배신하고 나를 도울 리가 없는 것이다. 1천 3백년 동안 집안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여 백제인 뿌리를 지켜왔다지만 그의 조국은 이제 일본이다.

    이윽고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사님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제 황제의 밀서 한 장으로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뀔 리는 없겠지요.」

    갑자기 목이 메었으므로 나는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지요. 도와주신다면 받아들이겠소.」

    아카마쓰의 제의가 없었다면 김윤정은 절대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미 김윤정은 일본대사관의 꼭두각시가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탓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인간 세상이며 약육강식의 법칙이다. 김윤정의 제의를 듣고 나서도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