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번째 Lucy 이야기 ⑤  

     문을 열어 놓아서 파도 소리가 선명하게 울린다.
    바닷가의 모텔 방 안이다.
    방의 불을 껐지만 맑은 날씨여서 흘러든 빛발만으로도 사물의 윤곽이 드러났다.
    방안에는 아직 열기가 식지 않았다.

    눅눅한 습기가 배었고 비린듯한 정액 냄새도 맡아졌다. 가쁜 숨소리는 겨우 가라앉았지만 고르지가 않다. 나는 지금 침대에 고지훈과 나란히 누워있다. 둘 다 알몸으로 천정을 향한 채.

    그러나 어색하지는 않다. 나른한 쾌감이 아직 배어있는 상태여서 몸을 조금 꿈틀대기라도 하면 하복부에 짜릿한 쾌감이 온다. 멋진 섹스였다.

    그렇다. 내가 고지훈을 유혹했다.
    저녁때까지 바닷가 카페에 앉아 적당히 술을 마신 후에 내가 고지훈의 팔을 끌고 이곳으로 들어 온 것이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팔을 끌고 세발짝 쯤 걷고 나서 앞쪽의 모텔을 눈으로 가리켰을 뿐이다. 그러자 고지훈이 앞장을 서서 모텔의 키를 받았다.

    방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 안고 키스를 한 후에 벗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한번도 어긋나지 않았다. 밀면 붙었고 붙으면 감겼다.
    파도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저것을 밀물이라고 했던가?

    밤 11시쯤 되었을 것이다. 오늘밤은 서울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렇게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낯설면서 익숙한, 그리고 편안한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이 기쁘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때 고지훈이 천정을 향한 채로 낮게 말한다.
    「참 좋았어요, 루시.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우스워서 나는 먼저 짧게 웃었다.
    「고, 당신은 섹스는 잘하지만 섹스 후의 대화가 서툴러요.」
    「그렇습니까? 배워야겠는데.」
    「그건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죠.」

    몸을 돌린 내가 고지훈의 몸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는 고지훈의 가슴에 턱을 붙이고는 시선을 맞췄다. 어둠속에서 고지훈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고, 내가 이승만 수기를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아세요?」
    고지훈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대신 말하라는 표시 같다. 내가 말을 이었다.
    「인연. 길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인연의 위대함을 느꼈어요.」

    고지훈이 손끝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 순간 나는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느낀다. 말 대신 손가락 끝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는 이 사소하며 다정한 행위가 이렇게 감동적이라니.

    내가 얼굴을 옆으로 젖히고 고지훈의 가슴에 입술을 붙이고 말했다.
    「당신의 조상과 내 조상이 먼 옛날 어느 때 틀림없이 부딪쳤을 거에요. 내 조상의 어떤 여자와 당신 조상의 어떤 남자든지. 또 그 반대이던가.」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한 내가 고지훈의 가슴에 손가락 끝으로 뭔가 글자를 썼다.

    그때 고지훈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운명.」
    「뭐라고 했지요?」

    내가 묻자 고지훈이 내 머리칼을 손으로 감으면서 웃었다. 어둠속에서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당신이 금방 운명이라고 썼어요.」
    「그래요. 우리의 만남은 운명 같아요.」

    내가 말하자 고지훈이 다시 웃는다.
    「당신은 이승만의 수기 영향을 받은 것 같군요. 루시.」
    「그래요.」

    내가 다시 고지훈의 가슴에 뭔가를 쓰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썼다.
    「인연.」

    고지훈이 다시 그것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