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좀 살다가 보면, 또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보면 인간이나 조직이나 궁극적으로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잡히는 것은 자존심이란 걸 알게 된다. 이 자존심의 크기만큼 인간과 조직이 커지고 格(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6·25 南侵(남침) 소식을, 고향에서 週末(주말)휴가를 보내던 중 들은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왜 즉각 파병을 결심했는가. 6·25 남침으로 미국인이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상태에서 왜 수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게 될 전쟁을 결단했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깊게 들어가 보면 결국은 미국과 트루먼의 자존심과 만나게 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대낮의 날강도짓 같은 南侵에 분노했다. 왜 분노했는가. 미국과 자신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 자존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미국과 자신이 자유진영의 챔피언으로서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그 사명감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영국은 미국과 같은 크기의 자존심이 없었다. 왜냐 하면 영국은 미국처럼 자유진영 전체를 수호한다는 사명감과 자존심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중공군이 개입하자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할 것을 권고하였다.
     
     李承晩은 고종을 타도하려는 쿠데타 모의에 관련되었다가 5년도 넘게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고종은 사람을 보내 이승만을 부른다. 여비를 보태주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신경질을 내면서 거절한다.
     
     왕이 만나자는 것을, 더구나 돈을 주겠다는 왕을 이렇게 거부해버린 데서 이승만의 엄청난 자존심을 읽을 수 있다. 이 자존심만큼 그는 커졌고 그 자존심에 맞추어 미국을 상대하면서 한국의 國益(국익)을 확보했다. 建國과 6·25 전쟁 기간중 한국의 운명이 그런 식으로 풀린 데는 이승만의 자존심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우리는 왜 민주화 운동을 했는가. 권력의 비위에 맞춰살아도 즐겁게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정부를 비판하고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하다가 감옥에 가거나 직장에서 쫓겨났는가. 권력자가 권력을 남용하여 부정축재하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기에는 나의 자존심이, 우리의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오기가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었다.
     
     국가의 자존심은 국민들의 자존심이 모인 것인데 대통령이 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헌법에 대통령이 국민과 국가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고 못박혀 있지는 않다. 의사가 처방전을 쓸 때 인간은 반드시 공기를 마셔야 한다고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통령이 국민과 국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을 우리는 항복이라고 부른다. 6·25 남침을 당하여 우리가 항복하지 않은 것은 국민의 자존심(거기에 기초한 자유)과 국가의 자존심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자서전을 읽으면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한다. 박정희, 전두환은 그렇게 비판하면서 왜 김일성 김정일에겐 본질적 비판을 하지 않는가. 박정희, 전두환은 김일성, 김정일보다 못한 사람인가?
     
     김정일에 대한 그의 굴욕적 표현을 읽어가면 "이 사람이 과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李承晩이 29세 때 썼던 '독립정신'을 읽으면 민족적 자존심이 느껴지고 김대중 자서전을 읽으면 자존심이 상한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의 대통령이 왜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집단의 수괴를 대하면서 할 말을 못하고 주눅이 든 모습을 보였는가. 이는 수수께끼이다.
     
     피해당사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은, 가해자인 김정일을 만나 당연히 6.25 남침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아웅산 테러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였어야 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우리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어야 했다. 국군포로와 탈북자 송환이 없으면 장기수 송환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천명하였어야 했다. 국가정체성과 人權수호의식이 초등학생 정도만 되어도 할 수 있는 일을 그는 하지 않았다. 회담 이후 그가 히틀러보다 더 악질적인 테러主犯을 향하여 쏟아놓은 찬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향해서 쏟아부었던 비난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는 민족의 원수에 대하여 평생 언론자유를 누리지 못하였던 불쌍한 사람이었다.
     
     김정일은 김대중에게 "주한미군이 우리에 적대적 태도를 버린다면 계속 주둔해도 좋다"고 말하였다. 북한정권의 재도발을 저지하는 게 주한미군의 존재목적인데, 그 목적 변경을 요구한 것이다. 김대중은 이 발언에 감동하여 북한정권이 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접었다고 선전하였다. 돌이켜 보면 김대중은 김정일에게 속아 그의 대변자役을 자처, 한국과 미국을 속이려 하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알면서 속았는지도 모른다.  
      
     2003년 초 퇴임을 앞둔 김대중 대통령이 對北 특사로 보낸 임동원 특보를 김정일이 만나주지도 않아 대통령 親書(친서)를 간접적으로 전달한 채 답도 반응도 듣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林특보는 "김 위원장이 중요한 지방 출장중이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대통령 특사를 오라고 해놓고 출장중이라니. 김대중 대통령은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셈이었다.
     
     그동안 김정일에게 굴종한다는 욕을 들어가면서까지 정성을 다해서 갖다 주고 퍼다 준 김대중 대통령에게 김정일이 한 짓이 이 수준이었다. 김정일에게 어떻게 보였기에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일까. 만약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특사를 오게 해놓고 만나주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는 또 反美 선동꾼들이 난리를 쳤을 것이다.
     
     미국에서 링컨을 욕하면서도 스탈린을 비판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이스라엘에서 히틀러를 好評(호평)한 사람이 수상이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들은 "김정일은 나쁜 놈"이란 생각을 가져야 할 헌법상 의무가 있다. 공개적으로 김정일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을 절대로 선출직 공무원으로 뽑아선 안 된다.
     
     인간의 자존심은 진실, 정의, 자유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공직자의 자존심은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한 自覺'이 덧붙여져야 한다. 김대중씨의 人格에서 빠졌던 부분이 이런 것들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