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29)

     제임스 헤리스의 대저택은 프랑스의 루브르 궁전을 모델로 만들었다는데 엄청나게 클뿐 나에게 감동을 주지는 않았다. 아마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강은 파티장 안에서 만나기로 했으므로 나는 김일국과 둘이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둘은 산뜻한 정장 양복 차림이었고 새로 산 구두도 반질거려서 손님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3백평도 더 될 것 같은 연회장에는 수백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는데 밝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밝은 소음이란 밝은 분위기속의 소음을 말한다. 낮은 웃음소리, 여자들의 화려한 의상, 천정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는 휘황한 불빛을 쏟아내었고 손님들 사이로 쟁반에 놓인 술잔과 과자를 받쳐 들고 하인들이 미끄러지듯이 헤쳐 나간다.

    기둥 옆에 서있던 우리 둘은 이강이 다가와 말을 걸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이공, 이쪽으로.」
    다가선 이강이 말했으므로 놀란 내가 머리를 들었다.

    어느새 이강이 사람들을 헤치며 앞장 서 가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 뒤를 따른다. 이강이 멈춰 선 곳은 안쪽 창가의 세 사내 앞이었다. 서양인 셋은 이강을 보더니 일제히 머리를 숙여 경의를 보였다.

    내가 이강 옆에 섰더니 시선이 모여졌다. 그때 이강이 나에게 영어로 말했다.
    「이공, 이 분이 아칸소주 하원의원이신 딘스모어씨.」
    그리고는 딘스모어라고 소개한 키 큰 사내에게 말한다.
    「이 분은 나와 같은 왕족으로 이번에 황제의 친서를 가져 온 미스터 리입니다.」

    나는 왕족으로 소개된 것이 걸렸지만 웃음 띤 얼굴로 딘스모어와 악수를 했다. 옆의 둘은 해운업자와 목축업자였다.

    이강이 딘스모어에게 다시 말했다.
    「딘스모어씨, 황제의 친서를 가져온 내 사촌을 국무장관 헤이와 만나게 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딘스모어가 나에게 시선을 주더니 웃음 띤 얼굴로 묻는다.
    「물론 그 사실은 일본 측에 비밀로 해야겠지요?」
    「대한제국 공사관측도 알면 안 됩니다.」
    정색한 이강이 목소리를 낮췄다.
    「공사관 관리들이 이미 모두 일본의 개가 되어있거든요.」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딘스모어가 이제는 나에게 묻는다.
    「왕자 저하의 사촌은 처음 뵙습니다. 지금 어디에서 묵고 계십니까?」
    그러자 이강이 대신 대답했다.
    「일본 암살자들을 피해서 내가 사가(私家)에 숨겨두고 있지요.」
    「그러시군요.」

    정색한 딘스모어가 내 앞으로 한걸음 다가와 섰다.
    「대한제국 공사관의 미스터 김한테서도 연락을 받았는데 왕자 저하의 사촌이라는 말은 않더군요.」
    내 시선과 마주친 딘스모어가 말을 잇는다.
    「헤이 장관과의 면담 일정도 내가 왕자 저하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딘스모어씨.」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2년 동안 주조선 미국공사를 지낸 터라 조선 통이다.
    내가 가만있기에도 거북해서 딘스모어에게 한마디 했다.
    「여기 오기 전에 알렌 공사님을 만났습니다. 알렌 공사께도 밀서 이야기는 하지 못했지요.」

    그랬더니 딘스모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알렌도 곧 교체될 겁니다.」

    놀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