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日成은 1986년 가을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2년 전 金日成은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것이 나의 마지막 해외여행이다’고 얘기했었는데 왜 또 갔을까?
     
     그 수수께끼는 동독 공산당 정치국 비밀文書 속에서 풀렸다. 1986년 11월, 즉 金日成의 訪蘇 한 달 뒤 모스크바에서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金日成이 자신을 찾아와 소련과 공산권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고르바초프는 金日成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수뇌회의에서 서울올림픽 참가여부가 논의되었다. 쿠바 수상 카스트로만이 보이콧에 찬성했고 다른 나라들은 참가를 결의했다. 남북한이 공동개최를 하는 방향으로 노력해 보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在獨 徐炳文 박사는 “86년 11월의 이 150여 페이지짜리 수뇌회의 기록일 읽어 보면 이 회의가 공산권의 급속한 개혁‧개방을 재촉하는 분수령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회의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했음을 솔직히 밝힙니다.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국민이 잘 살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퍽 감동적입니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공산권 국가들이 결정한 데는 국내적인 압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국가는 모두 체육 강국인데다가 두 차례나 반쪽 올림픽을 치러 또 다시 보이콧할 경우 국민들의 불만이 커질 것을 우려했을 겁니다. 북한은 동독에 대해서도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이것만은 호네커가 듣지 않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은 남북한 간의 결전이었을 뿐 아니라 동구공산권의 붕괴를 앞당긴 촉매제였습니다”
     
     동독 올림픽 선수단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보고서를 정치국에 제출했다. 徐박사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한국의 경기운영과 사회의 발전상에 대해서 매우 높은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한국이 올림픽에 정치나 이념을 개재시키지 않은 데 대해서 특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것이다.
     
     徐박사는 남한이 압도한 군비경쟁, 팀 스피리트 훈련, 그리고 서울올림픽이 金日成의 북한을 코너로 몬 3大정책이었다고 분석했다.
     
     朴正熙대통령이 10·26직전에 서울올림픽 유치를 결심할 때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 것이 ‘국제사회에서의 남북한 대결에 종지부를 찍고 東歐공산권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金日成은 서울올림픽에 맞불을 놓기 위해 평양세계청년 축전(1989년)을 유치했다. 이 준비를 위해 약 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는 바람에 경제파탄은 더욱 심해져 1990년부터 지금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KAL858편 여객기를 폭파해 115명을 죽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金賢姬는 ‘살아 있는 物證’으로 남아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데 일조했다.
     
     盧泰愚 정부는 서울올림픽이란 對공산권 비밀통로를 북방정책이란 고속도로로 확장시켜 북한의 우방들과 수교함으로써 金日成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동독만은 붕괴 때까지 한국과 국교를 트지 않았는데 이는 호네커와 김일성의 우정에 기인한다.
     
     1988년 호네커는 아내를 金日成에게 보내 남한과 수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金正日은 1989년 4월에 동독을 공식방문하기로 돼 있었으나 급변하는 동독의 내부사정으로 취소되었다.
     
     1991년 12월 안기부는 러시아 정부측으로부터 모스크바에 망명중인 호네커가 평양으로 갈 것이란 정보를 입수, 이를 독일정보기관(BND)에 알려주었다. 독일정부는 즉시 러시아 정부에 항의, 출국을 중지시키고 독일로 데려가 재판에 회부했다. 重病으로 풀려난 호네커는 칠레로 가서 거기서 1994년 초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