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연대의 드러난 궤적

    참여연대는 단순한 NGO가 아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신동아>가 보도한 ‘DJ가 아끼는 젊은 피 300인’에 이 단체 간부들이 대거 포함된 바 있고, 이후 이 단체 간부 출신들이 정부 주요 요직에 발탁되기도 한, 좌파 권력의 ‘인재 풀’이자 ‘씽크탱크’에 가깝다.

    참여연대는 1994년 9월 10일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산하에는 의정감시센터, 사법감시센터, 공익소송센터, 내부고발자지원센터, 인권센터, 사회복지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명의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참여연대는 설립 직후 국민최저생계비용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며, 대중적 지지기반을 넓히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로 명칭을 변경하고선 ‘사법개혁운동’을 시작 한다(이 활동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사법개혁추진위원회라는 성과로 나타난다).

    이후 각종 사회적 이슈가 나올 때마다 참여연대는 다양한 증거와 급진적 제안을 내세우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97년 소액주주운동을 시작하면서 제일은행(現SC제일은행)의 주주총회에 참석했고, 1998년에는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참석, 자신들의 주장을 편다. 1999년 2월 6일 제5차 정기총회에서는 공식 명칭을 ‘참여연대’로 바꾼다. 산하에는 조세개혁센터를 신설한다.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건 2000년부터다. 2000년 총선에서 참여연대는 다른 좌파 진영 단체, NGO 등 400여 개 단체와 함께 '2000 총선시민연대‘를 발족, 보수적인 성향의 후보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펼친다. 그들은 이를 ’메니페스토 운동‘이라 부르며 언론을 통해 적극 홍보했다.

    이번에 천안함 사태 관련 UN안보리 서한 사건의 중심이 된 ‘평화군축센터’는 이때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평화군축센터는 2003년 5월 22일 산하 기관으로 출범했다. 참여연대는 자신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2002년에 조주형 대령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F-15K 구입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면서 ‘여중생 살인 진상규명 및 SOFA개정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얻은 경험을 기반으로 평화군축센터를 출범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참여연대는 동년 9월 23일 평화군축센터 등을 주축으로 350여 개 좌파 단체들과 함께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을 발족,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반대를 이끌다시피 한다. 이때 평화군축센터는 여야 의원 40여 명 등과 함께 2003년 5월 ‘한반도평화국민협의회를 발족하는가 하면, SBS와 함께 ’평화를 이야기 합시다‘라는 반전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참여연대는 사회 이슈가 생길 때마다 나타났다. 이들이 특히나 대중들에게 노출된 건 노무현 정권에서부터다. 그들의 이름과 동일한 가치를 내세운 ‘참여정부’였던 탓인지 참여연대 출신들이 정부 요직에 등용됐고, 공중파 방송은 물론 주요 언론은 그들의 주장을 언급하거나 인용했다. 일부 언론들은 노무현 정부의 최대 리더 그룹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과 ‘참여연대’를 꼽기도 했다.

    실제 2006년 자유기업원이 출판한 ‘참여연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참여연대에서 임원을 지냈던 531명 가운데 직업을 확인할 수 있는 임원 총 416명 중 150명(36.1%)이 총 313개의 공직을 맡았고, 이 313개의 공직 가운데 121개(38%)는 ‘대통령 소속 기구’였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이 끝난 뒤 참여연대는 다른 좌파 단체들과 함께 ‘反MB 운동’을 전개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촛불난동이라든지 다른 이슈에서 정권퇴진운동을 벌인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때문에 이번 천안함 사태와 관련, UN안보리에 서한을 보낸 것도 이런 ‘反MB 운동’의 연장선에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참여연대와 486 운동권의 略史

    그런데 이 같은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는 참여연대는 겉모습만 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참여연대를 실질적으로 이끌다시피 한 김기식 정책위원장이 서울대 인류학과 85학번이고, 이태호 협동사무처장은 서울대 서양사학과 86학번이다. 이번 천안함 서한 사건을 주도했다는 평화군축센터장은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지만 집행위원인 이태호 처장이 실질적인 주도자였다고 한다. 여기다 지난 정권에서 이들이 30대 중반의 나이에 국가정책 결정에 상당한 입김을 발휘했는지를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파워가 나왔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런 의문을 풀 열쇠가 바로 운동권의 숨은 역사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운동권의 역사는 80년대 광주사태를 시작으로 1993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의 해체와 동시에 끝난 것처럼 알려져 있다. 냉전질서가 붕괴되고,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운동권에 참여하는 이들이 크게 줄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전대협의 주요 핵심세력들은 NL(친북주사계열)과 PD(민중사회주의계열)로 나뉘어 다른 길을 걷게 되면서 세력이 약해졌다고 본다. 이들 운동권을 뒤에서 조종하던 ‘선배’들 또한 운동권의 변화에 새로운 활동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이때 일부는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일부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부는 정치권 주변으로, 일부는 창업으로 다른 길을 찾았다. 이때 소수의 운동권들은 새로운 대안으로 ‘시민사회단체’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실제 참여연대와 관련이 있는 운동권의 역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민주화 운동’이 아닌 ‘간첩단 사건’이라 불리는 공안사건들과 연관이 있다. 80년대 초반 서울대 지하서클을 이끌던 한 인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의 맥(脈)은 1968년 적발된 통혁당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이런 인맥은 1차 인혁당(1964년 적발)-2차 인혁당 사건(1974년 적발)-남민전 사건(1979년 적발) 연루자들로 이어진다.

    이후 운동권은 79~80년에 거친 무림 사건과 학림 사건, 깃발 對 반깃발 논쟁 등을 거쳐 주체사상을 받아들이는 NL과 사회주의 혁명을 과제로 삼은 PD로 나뉘게 된다.

    이때 운동권은 공안당국의 수사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반공개조직과 지하조직으로 이원화해 활동하는 게 원칙이었다고 한다. 이때 지하조직을 운동권들은 ‘언더’라고 불렀고, 이들은 운동권의 ‘두뇌’ 역할을 맡았다.

    참여연대는 이 같은 ‘언더’들이 지도하면서 시작됐으며 김기식 처장이나 이태호 처장 등은 이들의 지도를 받은 2세대라는 것이다. 때문에 박원순 희망제작소 이사나 차병직 변호사,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등 참여연대의 초기 책임자들은 실질적인 설립자들이 아니라 이들을 지원해 준 조연이었다는 게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설명이다.

    참여연대를 조직한 ‘언더’ 그룹들은 이들 ‘조연’의 명망과 인맥을 통해 전문가 그룹을 섭외하는 한편, 대중적 기반을 넓히기 위한 활동에는 운동권 인사들을 활용하는 전략을 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언더’ 그룹은 후배들을 양성하고, 전면에 나선 ‘운동권 명망가’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기르는, ‘윈-윈’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참여연대가 결성된 뒤 10여 년 간의 활동을 통해 ‘언더’그룹의 후배들이 정치적 경험과 실무능력을 어느 정도 쌓은 노무현 정권 때부터 ‘공식적인 1세대’들은 ‘운동권 후배’들에게 권한을 이양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김기식 처장, 이태호 처장 등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②486세대, 그들이 말하는 ‘참여’와 ‘연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