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연대라는 이름을 선택한 건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이다.
    일반적인 국민들은 이 이름을 보면서 ‘아, 시민들이 참여하고, 서로 연대해서 활동한다는 말이겠구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운동권이 말하는, 그리고 그 또래집단들이 생각하는 참여와 연대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이는 그들의 영문 이름이 ‘People's Solidarity for Participatory Democracy’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참여(Participatory)’의 의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여’를 사전적 의미인 ‘일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486세대나 운동권 출신들이 이야기하는 ‘참여’는 ‘참여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다른 말이다. 

    ‘참여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현재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채용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던 직접 민주주의와는 조금 개념이 다른, 민주주의 실천의 다른 방식이라고 한다. 

    즉 ‘참여민주주의’란  현재 다수의 국가가 채용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는 결국 선거에서 당선된 계급 엘리트 중심의 체제로서, 기층민중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탐욕스러운 엘리트들에 의해 다양한 갈등이 발생한다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필요할 때면 현실 정치에 직접 개입할 수 있도록 만든 민주주의 방식을 의미한다. 

    부연하자면, ‘참여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단체’들이 대의민주주의의 대표자들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판단되면,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개입, 영향력을 발휘해 ‘바른 궤도’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지난 정권에서 486 운동권 출신들이 권력의 핵심 또는 그 주변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을 ‘참여민주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개념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던 정치인이 바로 故김대중 대통령과 故노무현 대통령이다. 특히 故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개념을 현실에 접목시키고 싶어 했다. 그가 90년대 초반 설립, 486운동권 출신들과 동고동락했던 연구소의 이름이 ‘참여자치연구소’였고 나중에 그가 세운 정권의 이름마저도 ‘참여정부’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대(Solidarity)’의 의미 

    사회학에 관심이 많거나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은 ‘연대’라는 단어를 ‘연합’이나 ‘네트워크’보다는 조금 더 결속력이 강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 단어가 함의한 의미는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학에서 ‘연대(Solidarity)’란 사회관계의 일종으로 사회나 집단에서 보이는 통합(또는 통합의 종류나 정도)을 의미하는데 주로 사회주의적 이념에서 등장하여,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무산계급 민중 간의 타협을 유도하거나 이들의 단결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는 관계를 의미한다. 원래 이런 연대는 혈족이나 공통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들 간에 형성되는 관계를 의미했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점차 사회적 연대라는 의미로 발전한 것이다. 

    즉  ‘연대’라는 말은 사회발전구조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과거 계몽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 공산주의식 계급 구조 타파 및 기층 민중들을 중심으로 무산계급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조직 결성을 일컫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486세대나 운동권 출신들은 이런 식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랑스어인 ‘Solidarite’라는 용어를 주로 차용한다.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가 현대의 연대에 해당하는 정신’이며 ‘자유’와 ‘평등’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고귀한 표현’으로 포장을 해도, 결국 그들은 우리 사회를 일제 청산을 하지 못해 봉건적 계급주의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으며, 상위계층이 기층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실패한 사회’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참여’와 ‘연대’가 문제인가, '참여연대'가 문제인가 

    우파라면 이런 개념으로 활동하는 ‘참여연대’에 대해 대단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좌파적 시각의 미디어에 10년 이상 노출(?)되고, ‘자칭 우파’라는 여야 정치인들의 온갖 파렴치한 행동에 염증을 느끼는 다수의 국민들은 별 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참여’와 ‘연대’가 편향된 정치 이념과 시각을 가진 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연대’인데다 현실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다수의 국민이 무시하는, ‘참여연대’의 문제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참여연대의 핵심 인물 이태호 협동사무처장이나 김기식 정책위원장은 서울대 80년대 중반 학번이다. 당시 유명했던 주체사상 그룹인 ‘관악 자주파’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무성하다. 

    당시 ‘관악 자주파’ 등 주체사상파는 우리 사회구조의 모순과 기층민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식 계급투쟁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최고의 엘리트가 국가의 ‘뇌수’가 되고 다른 이들은 모두 그의 '수족'이 되는, 주체사상을 새로운 이념으로 받들었던 이들로, 최근 젊은 층에서 볼 수 있는 ‘감상적, 즉흥적 親김일성주의’가 아닌, ‘신념파 親김일성주의’였다고, 80년대 지하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증언한다. 

    이런 배경을 가진 이들이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참여연대는, 때문에 현재의 정부와 헌법은 물론 체제, 현대사마저도 부정하는 듯 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참여연대’의 행동들은 학술적 토론의 대상으로는 옳다 그르다를 따지기에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천안함 사태와 같이 김정일 정권의 위협이 현존한다는 점이나 최근 중국의 강성대국화와 노골적인 한국에 대한 압력 등을 생각하면 그들의 여러 가지 행동은 백번 다시 생각해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 된다.

    '③참여연대의 고민과 미래'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