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⑧ 

     「그러시면 안됩니다. 어명이신데...」
    상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위에서 사람을 부리는데 익숙해진 억양이다.

    정색한 상궁이 말을 잇는다.
    「제가 이공의 내력을 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하사금을 받으셔야 하오.」
    「아신다니 묻겠습니다.」
    나도 똑바로 상궁을 보았다. 추운 날씨였지만 추위를 잊었다. 상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 국제 정세는 대한제국의 생존에 지극히 불리합니다.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곳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갖고 가는 황제의 밀서 한통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말하는 동안에 내 가슴은 더 세차게 뛰었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공을 이루면 대신(大臣)으로 봉하고 국사를 함께 논하겠다고?
    내장원경으로 임명해서 백동화더미에 깔려 죽게 만들어 주겠다고 안 한 것이 다행이다.

    상궁은 가만 있었고 심호흡을 한 내가 말을 이었다.
    「조선 백성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사금은 도로 가져가시지요.」

    이번에는 상궁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내가 외면한 채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내가 대신(大臣) 감투를 바랐다면 독립협회 일을 안했지요. 아마 감옥에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상궁이 길게 숨을 뱉더니 나를 보았다. 가라앉은 표정이다.
    「황제께선 황실만 지키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시도 조선 백성을 잊으신 적이 없으시다오.」

    그리고는 상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께는 만나지 못해서 하사금은 전하지 못했다고 고하지요.」
    상궁이 나를 향해 머리를 숙여 보였으므로 당황한 나도 맞절을 했다.

    마루 위에 놓여있던 붉은 뭉치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상궁이 어둠속으로 사라졌을 때 옆쪽 부엌 모퉁이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다가온 사람은 박무익이다.
    「아니, 박공.」
    놀란 내가 눈을 둥그렇게 떴을 때 박무익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연히 다 들었습니다.」
    상궁이 앉았던 자리에 엉덩이를 걸친 박무익이 말을 잇는다.
    「내가 이공을 모시고 가고 싶지만 아직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기현이는 잘 큽니까?」
    불쑥 내가 물었더니 박무익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기현은 내가 감옥에 가기 전에 태어난 박무익의 외동아들이다.
    내 아들 봉수보다 세 살 어린 다섯 살이 되어 있었는데 그 위의 딸 미자는 벌써 열 한 살이다.

    「예, 이젠 제법 어른도 알아봅니다.」
    박무익이 말하고는 곧 정색하고 묻는다.
    「이공, 이중혁씨하고 같이 떠나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갑자기 박무익이 집에 들린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다. 머리를 끄덕인 내가 대답했다.
    「예, 이중진씨가 부탁을 했지만 이중혁씨와 함께 가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중혁은 감옥서 부서장이었던 이중진의 동생으로 성실한 인품의 사내였다.
    나는 이중진과 함께 이중혁도 개신교로 개종을 시켰는데 이번의 내 미국행을 듣더니 같이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박무익이 길게 숨을 뱉고나서 입을 열었다.
    「대신들에 이어서 황제까지 이공께 청을 넣는 것을 보면 대한제국의 앞날이 과연 풍전등화인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