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④ 

     백성들의 사는 방법은 이렇다.
    그 예가 기석(奇石)과 박무익이다.
    기석은 일본인 군속 이시다 주우로(石田十郎)의 통역이었다가 내 소개로 지금은 미국 공사관 통역이 되어있고 박무익은 의병장이다.

    조선 땅이 친청(淸), 친러, 친일, 친미 또는 보수 세력까지도 나뉘어져 이전투구(泥田鬪狗),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되풀이 하는 동안에도 백성들은 모질게 뿌리를 박고 산다.

    박무익의 관점에서 기석은 왜놈 앞잡이며 미국놈의 개로 보여야 맞다.
    또한 기석에게 박무익은 융통성없고 무지막지한 의병놈일 것이다.
    그러나 상극 사이이며 원수가 되어 있어야 할 둘은 서로 돕고 산다.

    기석은 일본과 미국측에서 빼낸 정보를 박무익에게 전해주고 박무익 또한 기석을 은밀히 보호해 준다. 둘 사이에는 친일파든 의병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 백성의 생활이며 사람 사는 세상이다.

    거꾸로 말해서 백성들이 등 따숩고 배부른 세상을 살았다면 애시당초 친일, 친미 따위가 생겨나지도 않았다. 친일 무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다른 정파를 제거하고 또 그 반대의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조선땅에 백성의 씨가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조선 영토와 백성을 위한 친일, 친러, 친미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임금과 왕조만을 위한 친일, 친미 따위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이 내 신념이 되어있다.

    나는 어금니를 물고 두 대신을 보았다. 거부할 명분이 없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개명(開明) 된 나라를 보고싶다. 더욱이 또 한가지 욕구가 있다. 옥중에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 신학문에 대한 필요성이다.
    더 익히면 민중 계몽에 더욱 유용하게 응용되리라.

    내가 입을 열었다.
    「가겠습니다.」
    「옳지.」

    반색한 한규설이 머리를 끄덕였고 민영환도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떠나 있는 동안 우리가 우남 가족은 돌보아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대감.」
    「하지만,」

    한규설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주미공사관에 비밀 전문을 보내겠지만 공식적인 도움을 받지는 못할 걸세. 그리고,」

    한숨을 뱉고 난 한규설이 나를 보았다.
    「공사관 직원들에게도 밀서를 소지한 사실은 말해주지 마시게.」
    「예, 대감.」

    내 가슴도 착잡해졌다.
    일본 측이 알게 되면 대한제국 조정은 한바탕 시달리게 될 것이다. 지난 8월의 한일협정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국에 종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머리를 든 내가 두 대신에게 물었다.
    「밀서 내용을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장관 면담시 참고를 해야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러자 한규설이 입을 열었다.
    「조·미 수호조약에 근거한 거중조정(居中調整) 항목대로 대한제국이 자치정부를 수립하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일세.」

    그리고는 길게 숨을 뱉는다.
    「우리가 열강들의 이해타산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청을 꺾을 힘은 미국 뿐일세.」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럼 그 댓가로 미국 측에 무엇을 내 줄 것이냐고 물을 뻔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륜이 뛰어난 두 대신이 그것도 잊고 있었겠는가?

    인간 세상도 그렇지만 국가 간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 원칙이다. 신의나 동정 따위를 기대한다는 것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두 대신이 그것을 모르겠는가?

    정동 사가(私家)를 나오는 내 다리는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