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① 

    내가 출옥하기 전인 올해 2월(1904, 2)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
    일본은 주차군을 설치하고 경찰제를 도입시켜 대한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같다. 감옥 안에서 밖의 사정은 다 들었지만 막상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은 참담했다.

     출옥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 8월 22일 일본은 대한제국과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를 의결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했다.

    「대한제국의 명운(命運)은 끝났습니다.」

    상동(尙洞)교회의 숙직실 안이다. 방 안에는 나까지 네명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박무익이다. 어깨를 편 박무익이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한다. 옆쪽에는 주시경과 기석이 앉아있다.

    박무익이 말을 이었다.
    「임금은 왕좌를 지키기에만 급급해서 백성들이 일본놈의 종이 되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민공동회나 독립협회를 놔두었다면 지금쯤 일본놈들이 이처럼 함부로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만민공동회나 독립협회가 해체된 지 6년이 되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딴전만 보았으며 주시경과 기석도 말이 없다.

    전에는 나도 그렇게 분개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임금도 인간이다. 또한 임금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최선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난일은 한탄 하는 것은 부질없다. 에너지의 낭비다.

    그때 박무익이 머리를 들고 나를 보았다.
    「어찌 하시렵니까?」

    방안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여졌다.
    출옥한지 20일이 지난 날이었다. 이곳 상동교회는 주시경과 전덕기 등 친지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내가 자주 들른다. 오늘은 박무익과 기석이 찾아와 넷이 둘러앉게 된 것이다.

    내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계몽 사업을 할거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지금 조선 땅에 필요한 것은 민중의 의식 개혁이요. 전제군주 치하에서는 열강의 침탈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이제는 충분히 입증되었을 테니까요.」

    그러자 박무익이 불쑥 말했다.
    「일본의 마수가 다 드러난 이상 조선 백성 전체가 의병으로 일어나 싸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잠자코 있던 주시경이 나서더니 머리를 젓는다.
    「그리고 승산도 희박합니다.」

    조선 땅에는 러일전쟁이 시작된 후부터 일본군으로 덮여져있는 것이다. 그때 박무익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 놈의 종으로 사느니 싸우다 죽을 겁니다.」
    박무익의 말끝이 떨렸다.

    내가 한성감옥소에 갇혀있던 5년 7개월 동안에도 박무익은 여러 번 의병 활동을 했다. 10여명, 때로는 서너 명의 수하를 이끌고 일본 병사를 습격하거나 부패한 관리를 암살했는데 전라도 광주에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고 했다.

    나하고는 생각이 다르지만 박무익만한 애국지사는 드물다.
    그리고 박무익과 나는 서로 의지하며 돕는 동지 사이인 것이다.

    그때 눈만 끔벅이던 기석(奇石)이 헛기침을 하고나서 말했다.
    「소인이 이시다씨한테서 들은 말입니다만,」

    모두의 시선을 받은 기석이 말을 잇는다.
    「일본군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다고 합니다. 조선 의병이 일어나면 오히려 그 핑계로 조선을 더 빨리 속국(屬國)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는 온몸이 굳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속국이란 표현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기석은 그 말을 지어낼 능력이 없다.
    이시다의 입에서 나온 말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