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이 패인 주름 너머 무거운 목소리로 전해져 오는 삶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역사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24일 기자와 만난 차승현(78) 할아버지는 차분하지만 슬픔을 머금은 목소리로 자신이 겪은 6.25 전쟁의 기억을 들려줬다.
    차 할아버지는 현재 대한노인회 강북구지회장과 삼각산 도당제 전승보존회장을 맡는 등 고령에도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전쟁 당시 서울 우이동에 거주하고 있던 차 할아버지는 전쟁의 포화를 가장 먼저 마주한 서울 시민 중 한 명이었다.
    "전쟁 나던 날 낮부터 조금씩 포성이 들리기 시작하더라. 트럭으로 군인들 막 실어가는 모습을 보니 실감이 났다"
    차 할아버지는 친척과 함께 몸을 숨긴 산에서 밤에 포탄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며 "의정부에서 창동 쪽으로 시뻘건 불빛 수십개가 날아오는데 무시무시하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전쟁이 발발하고 3일 만에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석달 뒤엔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서울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차 할아버지는 공포스러운 동족상잔의 현장을 또렷이 지켜봐야 했다.
    그는 "북한이 점령하면 누구와 좋지 않은 감정이 있으면 '저 자식이 뭐했다'고 인민군에 일러서 죽이게 만들고, 수복되면 '빨갱이다'라고 하면 경찰이나 군인이 나서서 죽이고…. 이게 참 전쟁의 비극이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인민위원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한 친척 어른이 총살당한 사연을 털어놓을 때는 차분하던 차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차 할아버지는 "나무에 묶어 앉혀놓고서는 총으로…. 어린나이에 그 장면을 보고서는 괜히 북한이 밀고 내려와서 그렇게 됐다는 생각에 한동안 북한 사람들이 철천지 원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차 할아버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다들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는 살고 싶어서 한 거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 같아서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차 할아버지는 당시 피난 과정에서 양민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도 생생히 기억했다. 특히 1.4 후퇴 과정에서 폭격받은 수도권의 한 다리를 건널 때 차 할아버지가 목격한 것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다리 주변에는 송장이 널려 있었다. 애를 업은 채로 죽은 엄마도 있었다. 피도 바닥에 흥건하고 수많은 사람이 시커멓게 타 있어서 무섭다기보단 오히려 현실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전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겪게 될 고통을 너무도 잘 알아서일까. 차 할아버지는 '전쟁만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한 사회에서 보수, 진보라는 사람들의 골이 너무 깊어져서 만약 전쟁이 나면 포탄에 맞아 죽는 사람들보다 내부 싸움이 더 크게 날 것 같아.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돼"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서로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안들이 마련되고 확산돼야 할 것 같아.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되고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도 좀 봐가면서 살아야지"
    젊은 나이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차 할아버지의 독백 같은 당부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