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전상태, 다시 말해 준전시상태의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진보단체가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의문을 유엔에 제기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부의 일차반응이라는 것은 고작「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사돈 남말 하듯 한다’는 속담 그대로다. 이른바 우익단체가 문제제기를 하자 검찰이 마지못한 듯 ‘위법성 여부를 검토해 보겠다’는 것이 고작 진일보된 모습이다.

    도대체 누가 답답한 것인가. 이런 사안이 발생하면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당연히 그리고 즉각 나서야 할 정부가 보여준 이상한 행동에 대해 다수 국민은 정말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하니까 이른바 보수는 이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어가고, 이른바 진보는 정부를 점점 얕보는 것이다. 그런 흐름이 표출된 것이 다름 아닌 지방선거의 결과이다. 10년 좌파정권 뒤에 집권하고도 국가운영의 大綱(기본)에 대한 선언도 없이 그저 實用主義라는 이름 아래 오늘은 ‘가진 자’, 내일은 ‘中道’로, 모레는 ‘젊은세대’로 그때그때 모면해 간다. 그래보았자 달라질 것은 없다. 기본이 없는데 변화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총리가 국회에서 정부의 안보팀에 병역면제자가 많다는 질문에 대해 ‘영국의 대처도 여성으로 포클랜드 전쟁을 지휘했다’고 답변했다. 참으로 무신경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질문의 취지 하나는 병영 무경험자가 군의 운용과 편제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있겠는가라는 것이고, 또 하나의 취지는 상류층의 병역면제가 다반사인 현실에서 국민통합이 되겠느냐는 의문의 표출이었다. 누가 대처가 여성인줄 몰라서 물었을까. 그리고 국민개병의 본지가 이미 흐려진 이 나라와 전시에는 귀족이 앞장서는 영국을 비교할 줄 몰라서 물었을까. 더구나 전문가의 완벽한 보좌를 받았던 대처와, 총리를 비롯해서 많은 면제자의 보좌를 받고 있는 이 나라의 통치시스템을 성별로만 비교하는 소이(所以)가 무엇인가. 그런 답변이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한국 언론의 행태도 이상하다. 또 하나의 무신경이 있다. 이 상황에서 군이 모욕감을 갖게 되었다는 감사보고가 참여연대의 ‘의문’과 함께 공개되어 국민을 혼란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사회나 담론은 좌우로 갈려져 있다(이데올로기 논쟁).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중심 내지 주류담론이 없다는 것이다. 중심담론이 성립하려면 정치의 힘이 작용해야 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현실이다. 중심 내지 주류담론이 토론을 통해 수렴될 수 있다는 것은 이상이지 현실은 아니다.

    사회주의적 담론이 한동안 지구의 절반을 석권했던 것은 볼세비키 혁명의 성공결과였다.
    리버럴 담론이 지구를 지배하는 것도 프랑스 혁명의 성공결과였다.
    이 사회에서 좌파적 담론이 건국 후에 처음으로 ‘세력’을 얻은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주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정권들은 담론 주도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었다.
    결과는 가두에서 나치와 독일의 공산당이 직접 폭력대결을 벌이는 것이었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바이마르공화국 그대로이다.
    명색 우파정권의 이 같은 수동성은 이미 적색경보를 받고 있다. 명색 우파정권의 지지층인 중간층의 경제력은 날로 쇠약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쇠약해진 중간층은 지방선거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른바 보수언론이 좌익발흥에 대해 소방수로 나서고 있긴 하나 그것도 ‘좌익이여! 그러지 말라’는 훈계로 일관하고 있다. 이미 전혀 다른 발상과 운동지침에 입각하고 있는 쪽에 대해 ‘훈계’하는 것은 효과 면에서 사실상 무의미하다.

    정부나 한나라당은 쇄신책을 연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오고 있는 얘기를 보면 모두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반성뿐이다. 문제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얘기다. 누가 비서실장이 되고 장관이 되고, 그리고 그 인사가 무엇이 문제라는 시비가 며칠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 진짜 중요한 본질적 문제들은 그대로 흘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