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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주한(駐韓) 미국대리공사를 지낸 조지 클레이튼 포크(Foulk.1856-1893) 미 해군 중위가 조선에 2년여 간 머물며 전개한 다양한 외교활동과 관련 자료들이 새로 드러났다.
연합뉴스가 입수한 포크 공사 관련 자료에는 그가 한국에 주재하면서 미국 정부에 전보로 보고를 하기위해 사용한 `한글자모.모스부호(Morse Code) 대조표'와 조선정부가 그의 지방여행을 허가한 여행허가서인 `호조(護照)'도 포함돼 있다.
또 나중에 창설된 미 중앙정보국(CIA)이 포크 공사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수집(Humint)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하고, 미군 당국은 포크 공사의 활동을 계기로 해외공관에 무관파견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미 해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한 포크 중위는 1883년 9월 민영익 등 조선의 첫 방미(訪美)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방미했을 당시 통역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5월 보빙사 일행이 귀국할 당시 체스터 아서 미 대통령에 의해 주한미대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돼 함께 조선에 왔고, 이후 1885년 1월 전임 푸트(Foote) 초대공사가 사임하자 20개월간 대리공사를 맡았다.
고종의 비공식 외교자문역을 맡아 조선 정부의 반청(反淸) 자주외교에 공헌한 그는 1887년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부인과 결혼해 수출입회사를 경영하고,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1893년 37살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그는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지방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고, 그가 입수해 위스콘신주립대(밀워키) 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대동여지도가 작년 11월 공개된 바 있다.
◇뉴욕공공도서관 포크공사 관련 사료 보관 = 포크 공사가 조선에 체류하면서 입수하거나 사용한 각종 사료들이 미국 뉴욕의 공공도서관(NYPL)에 상당수 보관돼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시카고에 거주 중인 재미 민간 역사연구가인 유광언 씨에 따르면 NYPL의 사본.기록보관부내 `조지 클레이튼 포크 서류' 코너에는 포크 공사의 활동과 관련된 많은 사료가 보관돼 있다.
이 중에는 조선후기 외교와 통상업무를 담당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1884년 9월8일 포크 공사가 조선의 지방을 여행할 수 있도록 허가한 여행허가서인 호조도 포함돼 있다.
이 호조에는 당시 전라감사 김성근과 나주목사 박규동 등과 함께 충청감사와 충주목사의 서명이 들어있어 그가 이를 갖고 전라도 및 충청도 일대를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 호조를 발급하기 전에 포크 공사에 대한 인적사항 등을 담은 조선 정부 내부의 행정서류인 조회(照會)도 NYPL에 보관돼 있다.
특히 포크 공사가 조선정세에 관해 정기적으로 미국 정부와 해군성 및 해군정보국에 전보로 보고하기 위해 사용한 한글자모 및 모스부호 대조표도 포함돼 있어 외교사 연구에 도움이 될 전망이다. 이 대조표는 한글자모와 모스부호 외에 영어 알파벳 및 일본 가타가나를 대비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NYPL은 1900년 5월 포크의 유족들로부터 이 자료들을 기증받아 보관해 왔다.
NYPL 자료에는 1886년 미국인 의사이자 선교사로 정동 교회를 설립한 윌리엄 스크랜튼에게 원산 여행을 허가한 호조도 포함돼 있다.
◇"포크공사는 인적정보수집의 선구자" = CIA는 홈페이지내 정보연구센터 코너(www.cia.gov/library/center-for-the-study-of-intelligence)에서 포크 중위에 대해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한 정보수집(Humint)의 선구자'로 극찬해 눈길을 끌고 있다.
존 프라우트 예비역 대령이 작성한 `최초의 주한미해군무관'이란 이 보고서에 따르면 포크 중위는 영국주재 미국대사관에 파견됐던 해군무관에 이어 해외에 파견된 두 번째 해군 무관으로, 파견 당시 3등 무관에 불과했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인 역할을 했다.
포크 중위는 특히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가마를 타고 조선의 주요 지방들을 시찰하면서 수도권의 군사요새와 지역민심 등 한반도 정세를 상세하게 파악해 해군장관 및 해군정보국에 보고했다. CIA는 그 증거로 웹 사이트에 포크 공사가 직접 그린 서울과 강화도, 북한산성 등이 포함된 수도권 지도를 함께 게재했다.
특히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조선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들에게 제물포로 피신하도록 지시하고, 갑신정변 발생배경과 원인을 심층 분석한 보고서는 당시 푸트 미 공사가 인용하고, 국무부의 연례보고서에 게재될 정도로 정확한 정세판단력을 과시했다.
푸트 공사가 이임한 뒤 갑작스럽게 대리공사에 임명된 포크 중위는 외교관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푸트공사가 대사관 공금을 모두 갖고 가 운영자금도 떨어진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정보망을 가동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조선의 우표를 모아 뉴욕에 있는 가족들을 통해 우표수집가들에게 판매해 활동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그동안 구축한 조선내 정보망을 총가동해 조선정부가 외국과 맺기 위해 마련한 각종 조약의 초안까지 입수할 정도로 뛰어난 정보능력을 과시했다. 또 고종은 그를 외국 외교관임에도 불구하고 내각의 군사담당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할 정도였다.
CIA는 포크 공사가 "초기 군사 정보장교의 전형(role model)"이라고 평가하고 특히 지속적으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정보원과의 접촉을 통해 조선정세와 사정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과시했다고 평가하면서 포크 공사가 이임한 이후 미 육군과 해군은 해외공관에 무관배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가 됐다고 강조했다.
◇셔먼호 배상문제 고심 = 포크 공사는 조선에 주재하는 동안 미 정부로부터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주민들의 공격으로 불에 타 침몰한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조선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고 고민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캐나다 출신으로 연세대 교수를 지낸 새뮤얼 홀리(Samuel Hawley)가 2008년 펴낸 `한국에 주재한 미국 남성, 조지 포크의 개인 서신들(1884-1887)'이란 책에 수록된 서신에서 확인됐다.
포크 공사는 1885년 10월13일 부친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근 정부로부터 20년전 발생한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선원들의 죽음과 재산피해에 대해 배상금을 받아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거기에 가있지 않으며, 조선이 이에 응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응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셔먼호는 당시 조선이 외국인들의 입국을 불허하고 있었던 만큼 올 이유가 없는데 온 것이다. 또 셔먼호가 총을 발사해 평양 주민들은 이 배가 자기들을 해치기 위해 온 것으로 믿게된 것이다. 평양주민들 입장에서 셔먼호는 첫 외부 공격자들인 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1886년 2월12일 구정날 부친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내 공직생활에 중대 기로에 서게됐다. 그동안은 정부의 지시가 내 도덕과 정의에 어긋나지 않아 충실하게 이를 이행해 왔다. 하지만 최근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조선에 배상금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았는데 이는 납득할 수 없다. 셔먼호는 조선에 올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아무런 경계태세도 갖추지 않은 채 모험 삼아 왔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왜 전임자인 푸트 공사 시절이나 아니면 1882년 조약(조미평화우호통상 항해조약)에 서명할 당시 해결하지 않고 이제 다시 지시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