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한 송이 꽃봉오리가 피어보지도 못하고 졌다. 그녀의 꿈은 유치원 교사였단다. 부산에서 실종된 지 11일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이모(13)양의 일이다. 올해 중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는데 너무나 불쌍하고 억울하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그런데 사고 뒷수습을 지켜보면 미국과 눈에 띄게 차이나는 게 있었다. 바로 그녀가 입학하기로 예정됐던 중학교의 교실 책상에 놓인 한 다발의 백합꽃이다. 교실에서는 TV 카메라가 돌아가고 교사는 그녀를 추모한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할 뻔했던 동급생들도 슬픔에 겨워한다. 어려운 일에 같이 슬퍼해주는 한국적 이웃 사랑의 방법이다.

    이런 경우 미국 학교에서는 처리 대책이 다르다. 지난해 우리 학교에선 한 학생이 방과 후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TV 뉴스에도 나올 정도의 사건이었다. 다음날 아침 모든 교사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절대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지시다. 아는 학생은 할 수 없지만 모르는 채로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을 잘 살펴보다가 정신적 충격을 받은 학생이 관찰되면 바로 신고를 하라는 내용이다. 학생 책상 위의 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날로 뉴욕시 교육위원회는 상담치료사, 심리학자 그리고 정신과 의사를 학교로 보내 1주일간 상주시켰다. 그 학생과 같은 반 학생들은 거의 강제로 1대1 면담에 참석해야 한다. 상담결과 심한 경우는 외부 치료를 결정하고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들의 역할은 이런 일이 사고라는 것을 강조하고, 이 일로 인해 염세적인 감상에 빠지거나 사회에 대한 자포자기 혹은 적의를 품는 것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의 이런 조처의 교육적 배경은 '미성년자인 아이들에게 슬픔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아직 그런 슬픔을 감내할 정신력이 약하기 때문에 이런 사건 하나가 그들 인생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염려가 깔려 있다. 결국 학교는 애도는 최대한 조용히 하고, 남아 있는 학생들의 보호에 최선을 다한다. 물론 성인인 교사들은 은밀히 모금운동도 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한다.

    한국과 미국은 이처럼 꽃문제 하나에도 눈에 띄는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이 정(情)의 문화라면 미국은 이성적 판단이 우선이라 하겠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다루는 언론과 사회의 태도를 보면 남아 있는 학생들을 위한 배려는 볼 수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은 냄비같이 들끓다가 얼마 가지 않아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일이나 없었으면 좋겠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