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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운찬 총리와 아주 약간의 접촉이 있었다. 이 접촉 정도를 ‘인연’이라고까지 격상시켜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민주화와 권위주의가 막바지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던 숨 가빴던 그 무렵.
신문사에 앉아 있는데 따르릉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를 싫어하는 나는 “또 뭐야…” 짜증내며 수화기를 들었다. 높은 옥타브의 낯선 음성이 들려 왔다. “형님, 저 이성규입니다.” “이성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성규?” “네” “아니 자네 웬 일이야? 오랜만이군” “네, 좀 급히 뵈어야겠습니다. 플라자 지하에 있습니다” 말하는 폼이 보통 다급한 것이 아니었다.
이성규 교수는 내 선친의 동경대학 친구이신 국사학자 이홍직 선생님의 자제다. 실없는 데라고는 단 한 치도 없는 그를 잘 아는 터라, 5분 안에 휑하니 그리로 달려갔다. 거기엔 이 교수 외에 또 한 사람의 젊은 교수로 보이는 총명하고 지성적인 인상의 선비가 함께 있었다. 그는 정운찬이라고 하는 서울대학 경제학과 교수였다. 상글상글 웃는 깨끗한 인텔리.
그들은 목숨을 던지고 있었다. “형님, 서울대학 교수 명의로 시국선언을 하려고 합니다. 이게 선언문입니다.” “아…!” 나는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서울대학 교수들이! 나는 선언문을 움켜쥐고 날듯이 신문사로 달려갔다. <서울대 교수 xx명 시국선언>-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 기사의 제목이었다. “만세…” 오랜만의 벅찬 흐뭇함과 통쾌함.
6.29 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다. 그 때 그 정운찬 교수가 느닷없이 사무실로 드리닥쳤다. “응? 무슨 일?” “저는 65세까지 교수만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조선일보에 내가 노태우의 사조직 멤버였다는 터무니없는 기사가 났습니다” 편집국에 연락해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정운찬은 억울하다고. 다음 판 신문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몇 해 뒤. 나, 정운찬 이성규 장달중 정종욱 한상진 등 서울대학 인연자들이 우연한 술자리에 둘러앉았다. 술기운이 돌자 정운찬 교수가 나에게 직설적으로, 그러면서도 다소 응석조로 불평했다. “선배님, 걔네들(운동권) 너무 조지지 마세요. 너무 하시데요.” “나는 민주적 진보를 건드린 적이 없다. 친북을 건드릴 뿐이다” 나는 그 때가 민주화 이후인지라 친북 NL 운동권을 그의 말 마따나 아무런 부담감 없이 거침없이 조지고 있었다. 그는 그게 이상했던 모양이다.몇 해 뒤, 나는 정운찬 교수와 그 일행을 코리아나 호텔 층계에서 또 우연히 조우했다. 그때의 그는 나에게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역력한, 의도적인 냉담의 표정을 싸늘하게 지어 보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그를 내 의식에서 유감없이 지워버렸다.
그 후 그는 서울대학 총장이 되었다. 더 이상 관심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는 서울대학 총장직을 아주 잘해 냈다. 노무현에 대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아니오‘라고 말한 그를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가 범(汎)좌파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때 나는 “응? 애기가 대통령?”하고 놀랐다. 역시 그는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더 놀랍게도 최근 이명박 쪽으로 ‘전향(?)’ 했다. 세상은 역시 오래 살고 봐야 하는 모양인가?
그런데…. 지금의 정운찬 국무총리는 그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그는 그 동안 우리가 모르는 사이 많이 크고 자란 모양이다. 세종시와 관련한 그의 국회 답변에는 의연한 자신감과 소신이 배여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이제 정운찬이 드디어 자기 페이스를 찾았나?국무총리 정운찬씨가 뒤집어 쓴 세종시 논란은 그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천형(天刑)이 될 수도 있다. 그는 그것을 축복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드는 이유는 뭘까? 한 마디로 그는 그래도 여늬 정치인들과 달리 지성, 학문, 교양을 저버릴 수 있을 만큼의 저질 깡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운찬 씨, 지금 잘하고 계십니다. 계속 선비의 외유내강(外柔內剛)으로 잡인(雜人)들의 행패를 의연하게 돌파해 나가세요. 그러면 훗날이 있을 수 있을지 누가 압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