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3년 일인당 국민소득 100 달러였던 우리나라는 1970년대 중화학 공업에 대한 집중적 육성을 통해 1977년 일인당 소득 1000불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제 2차 오일 쇼크가 터지고 과잉투자 논란에다 외채위기설이 돌면서 한때 위험한 수준까지 갔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회가 온 것은 바로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서였다. 당시 문제는 쌍둥이 적자였다. 1980년에 당선되어 취임한 레이건 행정부는 감세정책을 시행하는 동시에 군비지출 확장을 통해 재정지출을 늘리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세입감소와 세출증대가 겹치면서 재정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정부가 국채를 대거발행하면서 상황은 더 꼬이기 시작하였다. 미국정부발행국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달러사자’ 수요가 덩달아 증대되는 상황에서 달러가 강세가 되고 강세가 된 달러는 수입수요를 자극하고 수출에 제동을 걸게 되었다. 결국 재정적자가 무역적자로 연결되면서 소위 쌍둥이 적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비상이 걸린 레이건 정부는 결국 1985년 소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미국적자의 38%가 일본의 흑자로 인해 발생한 사실을 전제로 일본의 수출을 줄이기 위한 대대적인 일본 엔화 절상이 시행되었다. 1985년 9월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의 5개국 재무장관이 미국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 모여 결의를 거친 후, 결국 일본 엔화는 3년여에 걸쳐 240엔/달러에서 120엔/달러수준에 까지 평가절상이 되어버렸다. 우리 식으로표현하면 1200원 하던 달러환율이 600원으로 떨어진 셈이다. 100달러짜리 물건을 수출하고 번 돈을 12만원으로 환전을 하다가 갑자기 환전액이 6만원이 되어버린다면 수출업체는 거의 빈사상태에 빠질 것이다.
      이러한 수준의 강력한 엔고유도정책에 일본은 동의하였고 미국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가격은 치솟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고속의 엔고정책의 수혜자가 된 것이 바로 우리 경제였다. 중화학 공업의 육성과정에서 일본과 비슷한 산업구조를 가지게 된 우리나라는 일본과 종류는 비슷한 물건을 수출하였지만 당시 일본 제품은 고급제품으로 인식된 반면 한국제품은 질이 낮은 제품으로 인식이 되었다. 당시 삼성브랜드의 별명이 ‘가난한 사람들의 소니’(poor man's Sony)였던 것을 보면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런데 플라자 합의로 인해 유도된 엔고로 인해 고급제품인 일본제품의 가격이 갑자기 오르자 품질이 낮은 중저가 제품에 수요가 몰리면서 우리나라 제품 수출이 갑자기 급증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우리나라의 경상수지는 건국 이래 최초로 제대로 된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47억 달러흑자로 시작된 흑자행진이 1989년까지 4년간이나 이어졌고 이에 힘입어 경상수지흑자를 토대로 한 고도경제성장이 계속되면서 우리의 일인당 소득은 1995년 11000여 달러를 기록하였다. 드디어 1000달러를 넘은지 18년 만에 일인당 소득이 10배가 되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 ▲ 지난 9월 25일 미 피츠버그의 컨벤션센터에서 포즈를 취한 G20 정상들. ⓒ연합뉴스
    ▲ 지난 9월 25일 미 피츠버그의 컨벤션센터에서 포즈를 취한 G20 정상들. ⓒ연합뉴스

      미국이 주도한 플라자 합의가 우리 경제를 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경제는 결과적으로 선진국 주도의 플라자 합의의 최대의 수혜국이 되었다. 중요한 국제현안을 정하는 데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지만 결정된 사항에 의해 추진된 정책의 수혜를 받은 셈이다. 그 뒤로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발 빠르게 회복하면서 다시 한 번 실력을 세계 각국에게 각인시키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국제기준의 설정자적 지위는 매우 어려운 지위이다. 정글 같은 국제사회에서 선진국들은 한번 잡은 헤게모니를 쉽게 양보하려들지 않는다. 사실 국제기준의 설정자적 지위는 매우 유리하다. 따라서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면 굳이 이러한 권리를 다른 국가와 나누어가질 필요가 없다. 별 위기 없이 계속 국제경제의 흐름이 이어졌으면 G8 중심의 구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지속이 되었을 터인데 2007년 서브프라임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국면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경제위기의 책임을 지게 된 미국 등 선진국들이 자신들만으로는 전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이다. 특히 중국이라는 강력한 파워국가가 빠진 회의는 문제가 있었던 셈이고 결국 과거 1999년에 재무장관회의로 만든 G20 회의를 정상회담으로 격상시켜서 G20정상회의가 탄생한 것이다.     일단 국제적 아젠다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정상들이 논의 하게 되면 수많은 실무진들이 이 회의와 관련한 이슈를 챙기게 되고, 결국엔 참여국들의 의사가 어떤 형태로든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게 된다. 물론 발언권이 처음부터 강해지지는 못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할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단 이러한 장이 마련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25년전 플라자 합의가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듯이 이제는 경제위기가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왔을 때 잘 잡아야한다. 정상회담과 관련하여 각종 워킹그룹의 활동을 잘 이용해야 한다. 아젠다를 계속 제시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논의하는 각종 실무분과위원회를 잘 가동시키도록 하고 이 모임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매년 2번씩 열리던 회의가 내후년부터는 연 1회로 줄어들지만 회의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슈들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실무회의는 거의 연중무휴로 움직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노력하기에 따라서 G20 회의는 우리에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회의이며 더욱 의미 있는 회의로 만들 수 있는 여지도 있다. 2010년에는 우리가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자 개최국이 된다. 이 점을 십분 활용하여 회담 개최지로서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홍보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올림픽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회의니 만큼 하드웨어적인 요소와 소프트웨어적 요소를 잘 결합시킬 때 G20 회담은 우리에게 각종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일단 기회는 외부적인 환경 변화에 의해  주어지기는 했지만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효과는 매우 커질 수 있다. 플라자 합의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은 것처럼 G20 회담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품격이 한층 올라가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효과가 극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