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언론들이 '세기의 재판'이라 이름 붙인 전직 총통에 대한 재판은 타이베이(臺北) 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세계로 생중계됐다. '당장 석방하라'는 지지자들과 '사형을 선고하라'는 반대파들의 피켓과 구호가 뒤엉킨 모습도 보였다.

    지난 11일 오후 4시에 시작된 1심 재판이 20분쯤 지났을까. 방송들이 "천수이볜(陳水扁)은 무기도형(徒刑)"이라고 흥분했다. 무기징역이란 뜻이다. 2억대만달러(TWD·약 75억원)의 벌금형과 평생 공민권 치탈(��奪·박탈이란 의미)형도 함께 내려졌다고 전했다. 곧이어 부인 우수전(吳淑珍)씨에게도 무기도형과 평생 공민권 박탈, 3억TWD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인권변호사이던 남편이 정계에 뛰어든 직후인 1985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24년째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온 여인이다.

    군형법상 반란죄(12·12사건)도, 형법상 내란죄(5·18사건)도, 수많은 민간인 학살도 없는 순수한 부패사건인데 무기징역이라니…. 홍콩의 문회보도 12일자 1면 톱 제목을 '경천동지할 부패사건 판결'로 뽑아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형량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더욱 놀랍다. 부부의 공동 범죄는 국무기요비(기밀비) 1억400만TWD(약 39억원) 횡령이다. 국무기요비는 총통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비밀 외교 활동비다. 법원은 이 횡령행위를 가장 무겁게 보고 부부에게 똑같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총통부 비서장(44)과 총통부 주임(42)에게도 각각 징역 20년과 징역 16년을 선고했다. '젊은 집사'들이 수년간 비밀 외교 문건을 조작하고 돈을 빼돌려 총통 부부가 '사금고'처럼 쓰도록 부부의 비리에 충성한 죄가 이렇게 무거웠다.

    부부는 무기징역 이외에 각각 28년과 56년의 유기징역도 선고받았다. 천수이볜은 룽탄(龍潭)부지 인·허가와 관련해 3억TWD의 뇌물을 받은 혐의에 대해 징역 20년, 부정한 돈을 해외로 빼돌려 세탁한 행위에 대해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부인 우수전도 룽탄부지 뇌물 3억TWD에 대해 남편과 똑같이 징역 20년이 선고됐다. 하지만 돈세탁 행위에 징역 18년, 난강(南港)전람관 공사와 관련한 뇌물 수수(9180만TWD)에 징역 18년이 선고됐다. '총통부 안방마님'이 총통보다 더 주도적으로 돈세탁을 했고, 총통도 모르게 뇌물을 받았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징역 30개월과 20개월을 각각 선고하면서 벌금 1억5000만TWD씩을 부과했다. 부부와 아들, 며느리까지 합친 벌금 액수가 8억TWD(약 299억원)다. 그밖에 딸과 사위, 처남(우수전의 오빠) 부부까지도 징역형이 선고됐다. 천수이볜의 변호인은 "사실상 전 재산 몰수에 일족을 멸(滅)하는 너무나 가혹한 판결"이라며 반발했다.

    중형 선고 이유를 판결문은 이렇게 설명했다. "총통에 오른 천수이볜은 '한 사람이 부패하면 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一人貪戾 一國作亂),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 윗사람의 행실은 아랫사람들이 따라 한다(風行草偃 上行下效)'는 세상의 이치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개혁의 깃발을 높이 내걸고 뒤로는 몰래 부패한 짓을 일삼았다."

    판결문은 명심보감의 " 知足常足(지족상족) 終身不辱(종신불욕), 知止常止(지지상지) 終身無恥(종신무치)"로 끝을 맺었다. 만족할 줄 알아 항상 만족하면 죽을 때까지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아 늘 그치면 죽을 때까지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홍콩의 일부 언론은 재판 소식 말미에 1980년 이후의 한국 대통령 일가의 부패사건을 또다시 거론했고, 어떤 신문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까지 싣고 '자살로 끝났다'고 전했다. 바깥세상은 냉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