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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 예방 백신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신종플루 공포에서 벗어날 유일한 구원 투수는 치료제 타미플루다. 하지만 타미플루로 대표되는 항바이러스제는 시중에서 좀처럼 보기도 구하기도 힘들다. 우리는 왜 타미플루가 부족하고 서둘러 확보하지 못한 것일까.
2005년 10월 9일 오후 조류인플루엔자(AI)가 동남아에서 번지자 부총리와 사회부처 장관들은 정부중앙청사에서 회의를 열고 타미플루 100만명분을 더 비축하겠다고 했다. 이 보고를 받은 당시 국무총리는 "적절한 수요와 공급 능력을 검토해 신중하게 정책 판단 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많이 쌓아 낭비하지 말란 얘기였다. 총리의 '신중 대처' 한마디에 장관 회의 결과는 흐지부지됐고, 이듬해 정부는 100만명분이 아니라 고작 28만명분만 사는 데 그쳤다.
비슷한 상황은 이듬해인 2006년 12월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도 이어졌다. 여야 의원들이 타미플루를 선진국처럼 전 국민의 20%, 1000만명분을 확보하라고 복지부장관에게 요구했다. 그러자 장관의 답변은 이랬다. "타미플루는 보존기간이 5년(지금은 7년)인 만큼 해마다 20%씩만 바꿔도 매년 700억원(사실은 500억원)의 돈이 없어집니다. 개인적으로 (AI에) 매년 700억원을 쓰는 것과 해마다 수십만명이 걸리는 결핵에 투입하는 것 중 고르라면 결핵에 투입하는 게 낫다는 생각입니다." 그 결과 이듬해 정부가 산 것은 24만6000명분에 불과했다.
그나마 올 초까지 타미플루를 전 인구의 4%, 200만명분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작년에 AI가 전국을 휩쓸면서 '발등의 불'이 되자 예산당국이 부랴부랴 예비비까지 꺼내 70만명분을 더 구입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신중론'이나 '비용 효과'를 내세운 총리나 장관 같은 고위관료들의 말과 판단도 일리가 없지 않다. 신종 전염병이 미래에 크게 돌지, 안 돌지 누구도 모른다. 사망자가 한명도 나오지 않았는데도 거액을 들여 약을 창고에 가득 쌓았다간 포장도 뜯기 전에 유효기간이 끝나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사태가 빚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타미플루가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생명 보험료'란 사실이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머리가 모자라 과연 헛돈 들여 타미플루를 쌓아 놓았을까. 미국은 동남아에서 AI가 발생하자, 2005년에 국민 25%분의 타미플루를 확보하고 예방 백신 개발에도 나섰다. 우리가 '돈타령'을 하는 사이 영국은 전 국민의 30%, 일본 20%, 프랑스 23%, 싱가포르 25% 분량의 타미플루를 비축했다.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영국은 전 국민이 맞을 분량의 예방 백신까지 입도선매(立稻先賣)식으로 확보했다. 신종플루 공포가 확산돼도 이들이 불안에 떨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2007년까지 타미플루 비축 목표량조차 세우지 않았다. 그 이유가 "목표를 세우면 그만큼 사야 하기 때문"이었다는 게 당시 복지부장관의 진술이니 황당할 뿐이다. 당시 일부 정부 관료는 AI 발생이 미국산 치료제를 팔기 위한 '미국 음모론'이란 말까지 거론했다니 기가 찰 뿐이다.
환경 정책에 '사전 예방의 원칙'이란 게 있다. 사람이나 환경에 심각한 피해가 올 가능성이 있다면 과학적·임상적 증거가 불충분하더라도 광범위한 사전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부의 전염병 정책은 바로 이런 사전 예방조치에 의해 다뤄져야 한다.
신종플루나 사스, AI 같은 신종 전염병들이 최근 30년간 매년 1개꼴로 새로 발생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은 1997년 국립도쿄의료원을 국제의료센터로 바꿔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신종전염병을 연구하고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우리도 신종 전염병 공포시대를 이겨내려면 그런 연구기관 한 개쯤은 마련하고 투자해야 한다. 신종플루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 비용보다 이런 사전 예방책이 오히려 더 싸게 먹히는 보험료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