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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태을암에 다녀왔습니다.
하룻밤 절집 신세를 지며, 몸도 마음도 다 내려놓고 쉬다 돌아왔습니다.
정말 가끔 이렇게 나 자신을 내려놔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명지대 김정운 교수는 언젠가 독일 친구의 말을 빌려 한국인들의 정서는 우리가 그간 얘기해온 ‘한(恨)’이나 ‘정(情)’이 아니라 ‘분노’라고 말했습니다.
분노, 분노라….
‘아리랑’의 가사를 얘기하고 소월의 시를 말하며 ‘한’과 ‘정’을 말해오던 우리로선 언뜻 수긍하기 어렵지만, 주변을 잘 살펴보면 ‘분노’가 한국인을 지배하는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장을 입으면 신사인 사람이 예비군복을 입혀놓으면 막 되어먹은 사람처럼 행동한다든지, 얌전한 사람도 운전대를 잡으면 천하의 욕설장이로 변신한다든지…. 이런 경우들을 보면 한국인의 생활 속에서 ‘분노’가 차지하는 부피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상에 떠다니는 분노를 헤치고 사는 우리는, 정말 가끔 이렇게 아무 것도 않고 쉬어줘야 합니다.왜 한국인들의 가슴에 커다란 분노가 자리할까?
사회심리학자라 할지라도 그 원인을 헤아리긴 힘들것 같습니다. 단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이념 과잉’이 그 원인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몇 달을 두고 두 대통령이 세상을 등진 2009년의 한국은 요즘 그 이념과잉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아주 심하게.
자살한 대통령을 현직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죽였다고 떠드는 것은 심각한 이념과잉의 잔해입니다. 그리고 이제 병사(病死)한 전직 대통령의 장례를 놓고 편을 갈라 전투를 벌이는 것 역시 이념과잉입니다.
국장(國葬)은 절대 안 된다고 목소리 높이고, 국장을 치르면 현직 대통령에 대한 지지 철회는 물론, 반대투쟁까지 벌이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편에서는 동작동 현충원에 없는 땅을 ‘만들어서라도’ 묘소로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현직 대통령이 집무 중 사망했을 때가 아니면 치러지지 않는 국장을 ‘자기만은 꼭 해야 되겠다’고 버팁니다.
계산된 분노의, 하지만 합리적이지 않은 분노의 표출입니다. 별 생각 없던 일반 시민들까지 전염병처럼 분노의 대열에 합세합니다. 술자리에서 이웃끼리 죽일 듯 치고 받고, 뜻이 다른 형제자매들은 전혀 무관한 일로 남처럼 등 돌립니다.이럴 때 중심을 잡아줄 부모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진짜 비극입니다. 롤 모델이, 멘토가 없는 한국. 대통령이 그 부모 노릇을 해야 하는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같은 망령 때문인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피의 잔치를 벌여온 우리는 그 업보로 국민 모두가 사생아가 됐습니다. 원인도 모르는채 분노에 들끓고 한바탕 판을 벌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그리고 이 국민들을 추스르는 것은 정말 지난(至難)한 일입니다.
경제위기로 나라가 흔들릴 때 대통령이 됐습니다. 외화 유동성 위기 때는 밤잠 못 자며 은행 창구까지 살펴봤고 이제 그런 땀과 발품 끝에 길고 숨 막혔던 터널의 끝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권 초부터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분노’였습니다.
10년 정권을 빼앗긴 좌절의 분노가 촛불을 만들어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촛불에 발목 잡혀야 했습니까? 초등학생까지 선동하고 유모차까지 동원한 그 촛불은 꺼졌지만 그 후유증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前 대통령을 여윈 지지자들의 ‘분노’는 ‘자살’이며 ‘검찰 수사’라는 단어는 아예 폐기한 채 대통령을 ‘살인자’로 몰아붙였습니다. 장례식의 대통령에게 막말을 해도 되는 나라에는 ‘독재자 OUT'이라는 구호까지 등장했습니다. ’갈 데 없는 분노‘는 분별 역시 잃기 마련입니다. 끝없이 분노를 만들어내고 만들어진 분노를 재활용하고 체제 전복의 무기로 화염병에 불을 붙입니다.4대강 살리자고 하니 대운하 공사라고 합니다. 미디어 다양화하자고 하니 미디어 장악이라고 합니다. 누구 말대로 ‘정말 대통령 노릇 못해 먹겠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번엔 국장 시비입니다.
대통령도 압니다. 원칙을 허무는 일인 것을. 그리고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국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설사 그 결정이 지지해줬던 이들에겐 서운한 일이어도 양보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 분노의 재생산은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국민장이든 국장이든 구시대 갈등의 악령일랑 만가의 조종과 함께 가라, 멀리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소망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간절한 기도였습니다.한국에 주어진 선진화의 시계는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낡고 병든 분노의 이데올로기에 일일이 맞서기엔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누구 하나 몰매 맞을 각오로 대통령을 대신해 나서는 소신파도 없습니다.
태을암엔 보물 432호 태안마애삼존불이 있습니다. 중앙에 작은 관세음보살 입상을 배치하고 좌우에 여래입상을 배치한 드문 형식입니다. 난 이 삼존불의 배치를 원근법을 적용한 작품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좌우 여래입상이 앞서 길을 열어서 모습이 크고, 중앙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은 뒤에서 안내에 따라 걸어오는 작은 모습이라는 해석입니다.
원근법은 인식의 출발입니다. 원근법은 내가 어디 서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사물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나와 남이 다르다는 자의식도, 타인의 관점에 대한 이해도 제공합니다. 누가 어디 서있느냐에 따라 관점과 인식은 얼마든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달라야 마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