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태평양 연안 구리하마(久里濱) 해안은 페리(Perry) 제독의 미 군함이 1853년 정박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일본이 '구로후네(黑船)'라며 두려워한 페리 함대는 4척. 페리 상륙 이후 강요된 불평등조약과, 이에 따른 내부 살육전의 참상은 개국 직후의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런 구리하마에 페리 상륙을 기념하는 '페리공원'이 있다. 그 안에 기념탑과 기념비가 있는데, 비문의 함의(含意)가 다소 달라 읽으면서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평온한 졸음을 깨운 증기선, 단 네 척에 밤잠도 못 이뤄.' 기념비의 글을 쓴 인물은 에도(江戶) 막부의 고위 관료를 지낸 봉건영주 마나베 아키카쓰. 거대한 역사의 파도에 직면한 구세대들의 당혹스러움이 드러나 있다.

    기념탑은 모습도 당당하고 내용도 깔끔하다. '北美合衆國水師提督佰理(페리)上陸記念碑.' 성대한 제막식이 열린 때는 상륙 48년 후인 1901년. 유신(維新)정부의 최고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가 기념탑의 비문을 썼다. 한 공원 안의 두 비석이 반세기 만에 공포에서 자신감으로 바뀐 일본인의 세계관을 대비시킨다.

    일본의 자신감은 같은 태평양 해안선에 인접한 미카사(三笠)공원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을 승리로 이끈 기함(旗艦) '미카사'를 84년 전부터 실물 전시한 공원이다. 안내판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 승리로, 일본은 독립과 안전을 유지하고, 국제적 지위를 높였으며, 억압받는 제국(諸國)에게 자립(自立)의 희망을 던졌다.'

    우리에겐 얼핏 자가당착 같지만, 그 후 20여 년 동안 일본이 정치·외교·경제·문화 전방위에서 시대를 압도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이 세계의 무관심 속에 식민지로 전락한 일도 러일전쟁 이후 찾아온 일본의 황금기에 일어났다.

    미카사공원에서 다시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면, 미 해군 7함대 시설이 있는 요코스카항(港)을 만난다. 함대 주둔의 역사는 태평양전쟁 직후 점령군이 이 항구에 상륙하면서 시작됐다. 패전(敗戰)의 산물, 피지배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닫힌 일본'을 '열린 일본'으로 바꿔 경제대국의 길을 연 결과는 '페리 상륙'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해안선을 타고 조금 더 올라가면 도착하는 요코하마(橫濱)의 요즘 풍경에서 확실히 가늠할 수 있다. 요코하마는 1945년 미군이 공폭(空爆)으로 초토화시킨 뒤 전후 일본을 지배하는 총사령부(GHQ)를 세운 곳이다.

    이런 요코하마가 올해 개항 150주년을 맞았다. 6월 기념일을 앞두고 축제가 한창이다. '개항' 하면 '침탈'을 떠올리는 어두운 그림자는 없다. 개방의 부작용을 개혁으로 극복하고 개방을 지렛대로 강국을 일군 역사적 승자들의 경쾌한 풍경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개방을 받아들일까. 6년 전 인천 개항 120주년을 맞아 개항 기념탑을 때려부순 것이 우리 수준이다.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는 명목으로, 세기를 두 차례나 넘기면서도 극복하지 못한 남루한 역사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자세라면 24년 후엔 개항장 전체를 때려부수는 살풀이로 150주년을 기념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물론 열린 마음으로 응전하면 앞으로 24년은 개항을 강요한 일본을 국력에서 따라잡고 역사를 축하할 수 있는 시간으로 모자람이 없다.

    '축복의 역사'와 '저주의 역사'는 조상이 결정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결정하는 현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