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박두식 논설위원이 쓴 <다시 고개 든 '난닝구·빽바지 악령'>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4년 전 이맘때쯤 열린우리당은 가장 힘이 센 정당이었다. 창당 1년 남짓한 초짜 정당이었지만 집권당이었고, 그해 4월 17대 총선에서 전체 299석 중 반수가 넘는 152석을 얻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셌던 이들은 2004년 12월 국회 2층 회의실을 열흘간 점거하는 '240시간 농성'을 했다. 헌정(憲政) 사상 처음 있는 여당 의원들의 국회 농성이었다.

    제1야당이었던 한나라당보다 30석이나 더 많았던 열린우리당이 농성이란 극한 수단을 택하게 된 발상은 엉뚱하기 짝이 없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데 필요한 당 안팎의 관심과 힘을 모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국회 농성을 시작으로 당시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도로를 찬반(贊反) 시위대가 점령했다. 해방구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농성의 숨겨진 속내는 당내 반대파 제압이었다. 열린우리당은 2003년 창당 때부터 문을 닫게 된 작년 8월까지 4년 남짓한 기간에 당의 노선을 둘러싼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등 당 주역들이 훗날 "우리가 망한 것은 민심과 동떨어진 내부 싸움 탓"이라고 할 정도였다.

    당내에선 이 다툼을 '실용 대(對) 개혁' 논쟁이라고 불렀지만, 당 밖에서 당에 이래라저래라 했던 인터넷 논객들은 '난닝구 대 빽바지'라는 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다. 실용파를 지칭하는 '난닝구'는 러닝셔츠의 일본식 표현이다. 옛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 때 일부 당직자가 속옷 차림으로 각종 회의 진행을 막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빽바지'는 '개혁파' 핵심 인물인 유시민 전 의원이 첫 국회 등원 때 회의장에 흰색 면바지를 입고 나타난 데서 유래했다. 당시 출입기자로서 이들의 논쟁을 현장에서 지켜봤지만 실용파가 왜 실용인지, 개혁파가 왜 개혁이라는 이름을 쓰는지에 대한 답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다지 실용적이지도 않고, 또 개혁이란 이름에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편을 갈라 다투는 패거리 싸움이라는 게 정확할 것이다.

    열린우리당 세력이 주축을 이룬 지금의 민주당은 이런 과거의 오류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다짐했다. 그러나 최근 당 정체성 논쟁이라는 이름 아래 '난닝구·빽바지의 악령'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싸움의 소재나 양상, 등장인물들까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4년 전부터 나왔던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야당의 노선 싸움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민주당처럼 2005년부터 4년 가까이 모든 선거에서 참패한 정당일수록 활로(活路)를 찾으려는 내부의 몸부림은 처절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다. 선거에 패한 야당이 이런 과정을 거쳐 다시 태어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 출발은 새로운 인물과 주도층이 국민적 공감을 얻는 새 노선과 비전을 제공하는 것이다. 민주당에는 이런 필수 요인이 빠져 있다. 그렇다 보니 영국 토니 블레어, 미국 오바마의 등장과 같은 감동과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민주당이 살 길을 찾든, 죽는 길로 가든 그것은 그들의 문제다. 그러나 집안 내부 정리도 못하는 정당이 세력을 넓히겠다며 이쪽저쪽 추파를 던지는 일만은 삼갔으면 싶다. 민주당은 여당과의 협상에서도 번번이 내부 갈등에 발목 잡혀 오락가락하고 있다. 민주당 내부 갈등이 종종 우리 정치의 불안요인으로 번지기도 한다. 집안 싸움의 불길을 밖으로 돌리는 것은 정말 염치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