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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정치부 차장이 쓴 <"감자가 몸에 좋다"던 장군님의 성인병(成人病)>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 내부인들이 만드는 북한 소식지 '림진강'이 3호(발행일 8월30일)째 나왔다. 림진강 발행인은 일본의 프리랜서 언론인 이시마루 지로(石丸次郞·46)씨다. 그는 1993년부터 15년간 북·중 국경을 50차례 들락거렸다. 북한주민 600명을 취재했고, 그중 몇몇에게 기자 훈련을 시켰다. 이들이 목숨 걸고 취재 작성한 글들이 림진강에 실린다. '류경원'이라는 필명의 기자는 조선 노동당 강사의 지방 강연 현장을 보도했다.
"김정일 장군님께서 '감자는 곧 쌀이고, 쌀은 곧 사회주의'라는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김일성 수령님의 '이밥(흰쌀밥)에 고깃국' 구상과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강사는 이런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준비된 말을 꺼냈다. "장군님께서 '감자는 암 방지에 대단히 효과적이다. 서양사람들도 감자를 주식으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중 속에서 "배고파 죽어가는 판에 웬 암 걱정이냐" "언제는 서양 쪽은 쳐다보지도 말라더니…"라는 반응이 나왔다고 류경원 기자는 전했다. 북 주민은 '감자가 쌀'이라는 구호가 나온 배경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코드 안 맞는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식량지원을 받기 싫다는 '반리명박 깜빠니야(캠페인)' 차원이라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이 림진강 기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속내를 털어놓고, 림진강은 그런 취재원의 신원을 익명으로 보호한다. 이런 방식으로 보도된 인터뷰 속에 "장군님은 경제 시찰 많이 다니던데, 인민은 쪼들리기만 한다"는 탄식이 있는가 하면, "장군님은 어디 나오문 손 흔드는 거밖에 모르구…"라는 위험스런 발언도 있다. 남쪽 우파들은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 집단환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껍데기 속을 못 본 탓이다.
"햇볕이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남쪽 좌파들의 꿈 역시 착각이긴 마찬가지라고 림진강은 증언한다. 바깥 사람들이 "북(北)과 소통했다"고 감격했던 일들에 대한 북한주민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작년 10월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에 대해 한 평양 시민은 "회담 앞두고 장마당(시장매매) 못하게 해서 백성들 볼이 부었다"고 했다. 올 2월 뉴욕필하모닉 평양공연에 대해서도 "하루 두 번씩 대동강 물 길어다 거게(공연장) 물청소 하느라 혼났다"고 했다. 밖에서 손님 오면 "(귀빈들이 지나가는)1호 도로 쪽 집들에는 뭘 좀 개따(가져다가) 나눠주고" 그 밖에 사는 사람들은 "울타리에 가둬 놓고 나오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북이 핵을 포기하면 1인당 소득 3000달러 달성을 지원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 3000 구상' 역시 달갑지 않다는 쪽이다. 평양의 60대 시민은 "웃대가리들 좋은 일 시켜주겠지, 나한테 차례가 오겠느냐"고 했고, 함경도의 30대 주부는 "그냥 쌀이나 보내주지. 또 무슨 수작이냐"고 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뇌졸중 소식에 세계는 긴장했지만, 북한 내부는 평온했다.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에 대한 정보가 통제된 탓이겠지만, 소식을 접한 주민 반응도 덤덤한 편이었다. 김 위원장의 유고 사태가 실제 발생해도 1994년 김일성 사망 때와는 분위기가 다를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북한 주민들은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겪은 뒤 "장군님이 우리를 먹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접었다. 대신 "내 먹을 것은 내가 장마당에서 챙긴다"는 각개전투 정신으로 무장했다. '감자가 이밥보다 건강에 좋다'는 장군님이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같이 '너무 잘 먹어서 생기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 만한 주민들은 다 알고 있다.
남쪽이 김정일 위원장 한 사람을 향해 쏟아 부었던 10년 햇볕은 헛일이 돼버렸다. 장군님이 육신의 병을 털고 일어날지도 불투명하지만, 북한주민 마음속 장군님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지 오래다. 한반도는 이미 '포스트 김정일'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