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연합통신 편집국장을 지낸 서옥식 성결대 교수(정치학 박사)가 보내온 것입니다>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전에 알지도 못하는 나라,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분연히 나섰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전쟁 1950-1953년』(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1950 Korea 1953)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의 한국참전비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참전비에는 사망, 실종, 포로 및 부상한 사람의 숫자를 미군, 그리고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을 구분해 아래와 같이 명확히 적어놓았다. 

    Dead Missing Captured Wounded
    U.S.A 54,246 8,177 7,140 103,284
    U.N. 628,833 470,267 92,970 1,064,453

    또한 공원 벽면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적혀있다. 많은 한국 관광객이 워싱턴을 방문하고 있지만 ‘영원한 불꽃’(eternal flame)이 타오르고 있는 고 케네디 대통령 묘소만 대부분 참배할 뿐 한국참전비를 둘러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6․25전쟁’ 58주년을 맞았다 

    6․25전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으며, 자유․공산 양대 세력의 세계적인 전쟁이었다.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 3자가 합의해 공산주의 영향력을 동북아에서 확대하기 위해 일으킨 남침전쟁이자 국제전이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인까지 남북한을 통틀어 4백여만의 사상자와 1천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어 냈다. 그 경제적 손실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대한민국은 가히 계수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인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은 1950년 7월4일 스미스 대대가 참전하면서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3년간 연인원 175만 명의 미군이 참전, 5만4천246명이 젊은 목숨을 바쳤고 10만3천284명이 부상했으며, 아직도 8천여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스미스 대대는 2차대전 때 용맹을 떨친 미보병24사단 소속으로 스미스(Charles Smith)중령이 지휘하는 특수임무부대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다시는 이러한 식의 전쟁은 치르지 않겠다는 뜻의 ‘Never again Korea’를 토로했으며 휴전 후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달래기 위해 한국전을 아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까지 불렀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결코 ‘잊혀진 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끝나지 않은 전쟁(Endless War)’이다. 

    주지하다시피 6․25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치밀하게 준비된 남침이었다. 김일성이 1950년 3월 5일 소련방문에서 최고지도자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협의한 뒤 5월14일 중국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과 만나 남침계획을 승인받았다는 것은 냉전이 붕괴되면서 공개된 소련측의 문서와 증언을 통해 전 세계에 다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스탈린과 김일성의 남침 목표는 신생 대한민국을 붕괴시켜서 스탈린이 대리 통치하는 조선인민공화국에 편입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6․25전쟁 이전부터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해왔다. 1946년의 ‘2·7 구국투쟁’과 ‘대구 폭동’, 1948년의 ‘제주4·3폭동’과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이르기까지 무장폭동에 기반한 대한민국 건국저지 및 공산화 작업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무장폭동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지 못하자 마지막 수단으로 나온 것이 바로 전면 남침전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의 허울을 쓰고 한국전쟁을 내전(civil war, internal war)이니, 민족해방전쟁이니, 통일전쟁이니,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간의 전쟁이니 하면서 대한민국을 지킨 세력을 반혁명세력으로 몰아가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린 16개 우방국을 내전에 개입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매도하는 세력이 날뛰는 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적의 야크(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을 침입,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지에 기총소사를 했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3분의1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군대는 단 한 대의 탱크도 없었고 비행기는 소형 정찰기 10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런데도 6․25전쟁을 내전이고 집안싸움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놀라울 따름이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천여명과 1천 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했다. 북한군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했다. 1군단 예하 1사단과 6사단은 105전차여단의 지원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3사단과 4사단 역시 105전차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격해 왔다. 

    북한군의 불법무력남침은 워낙 기습적으로 감행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엔은 헌장 39조와 41조 및 42조에 의거한 ‘집단안전보장’ 조치를 즉각 단행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요청으로 전쟁 발발 수시간 뒤인 6월25일 긴급회의를 열어 북한군의 무력 남침을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에게 ‘전투행위의 즉각 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이 제출한 결의를 9:0, 기권 1(유고슬라비아), 결석 1(소련)로 채택하면서 또한 모든 회원국이 동 결의문 집행에 있어 유엔에 대해 모든 원조를 제공하며, 북한집단에 원조를 하지 않도록 촉구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어 6월27일에는 유엔회원국들에게 “북한의 대남 무력 침략을 격퇴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찬성 7, 반대 1, 기권 2, 결석 1로 채택했다. 전황이 급박하다는 보고를 받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6월27일 우선 일본주둔 미 해군과 공군에게 즉각 한국으로 출동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며 유엔주재 미국대표 오스틴(Warren Austin)대사는 이날 트루먼대통령이 취한 조치는 유엔의 목적과 원칙, 즉 평화를 지지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일년전인 1949년 남한에서 철수했던 미군이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7월7일에는 안전보장이사회가 한반도에서 활동할 유엔군사령부를 구성하고 그 최고지휘권을 미국인 지휘관에게 위임하는 결의를 7:0, 기권 3, 결석 1로 채택함으로써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편성되고 북한군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6․25전쟁은 남북한 간의 전쟁이 아니라 본격적인 국제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유엔의 깃발 아래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그리스, 남아공, 네덜란드, 뉴질랜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에티오피아, 캐나다, 콜롬비아, 태국, 터키. 프랑스,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 16개국이 각기 육ㆍ해ㆍ공군 부대와 장비들을 파견했고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등 5개국이 야전병원과 병원선을 파견했다. 

    1950년 9월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반격으로 전선이 북상하여 유엔군이 압록강의 혜산진과 초산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번에는 마오쩌둥의 중국이 1백만에 달하는 ‘인민지원군’(중공군)을 투입하여 사실상 붕괴된 북한군을 대신하여 전쟁을 맡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10월 이후 인민지원군이 인해전술로 파상공격을 해오자 유엔군과 국군은 혼비백산하여 후퇴하게 되었고 51년1월 4일 서울이 두 번째 함락되는 수모를 당했다. 이에 유엔총회는 1951년 2월 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탄하고 한반도에서의 중공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수복하여 38선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개전이후 3년1개월만인 53년 7월27일 휴전이 성립돼 155마일 휴전선은 오늘날 까지 남북분단의 비극의 역사와 함께 민족의 한이 서려있게 되었다. 전쟁의 양상은 이렇게 해서 국제전으로 변모했지만 그 성격은 변한 것이 없다. 

    6․25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것은 수정주의(修正主義, revisionism)의 입장으로서, 수정주의자들에 따르면 남북한 모두가 전쟁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전쟁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이다. 그는 미국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하고, 분단국가의 기본구도를 형성시켰으며, 이로써 미국은 이미 한국전쟁의 씨앗을 한반도에 뿌렸다고 단언했다. 한국전에 대한 커밍스의 수정주의적 인식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측면과 남한의 반동성, 그리고 이들의 결합에 의한 음모적 전쟁 유도로 요약된다. 즉 ‘유도+침략(provoked invasion)이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북한에 대해서는 상대적 또는 독점적으로 도덕성과 민족정통성이 부여되고 전쟁성격도 민족해방전으로 규정된다. 그는 6․25전쟁의 성격을 ‘내전’(civil war) 내지 ‘시민적 혁명전쟁’(civil revolutionary war), 나아가 반외세․반봉건의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이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 “이 전쟁에서 누가 방아쇠를 먼저 당겼는가”라고 묻는 것은 학문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못박았다. 

    원래 수정주의는 1950-1970년대 초 미국 위스콘신대 외교사 교수로서 ‘미국 외교의 비극’(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 등을 저술한 윌리암스(William Appleman Williams)와 그의 제자들이 주도한 냉전시대사 연구의 학풍을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위스콘신 학파’라고도 불리는 이들 비주류 역사학자들은 19세기 이래 미국이 추구한 대외팽창정책은 미국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데 따른 경제적 필요에 기인한 것이라고 파악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주의적 정통(orthodox)학파 및 현실주의(realist)학파의 정치․이념 중심 통설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 콜코(Gabriel Kolko) 같은 급진 수정주의자는 “미국의 대외정책은 미국 자본주의의 위력과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있었다”는 시각을 갖고 미국이 개입한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은 모두 미국 자본주의체제의 경제적 필요성 때문에 일어났거나 참전한 것으로 보았다. 나아가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전개된 동서냉전과 관련해서도 미국은 전후의 세계질서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재편하기 위해 군사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소련에 공세를 취했고, 소련은 미국의 이러한 도전에 시종 수세로 임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정책을 비판했다. 

    ‘신좌파’(New Left)의 이론적 기수였던 커밍스는 1981년 그의 대표작 ‘한국전쟁의 기원:해방과 분단정권의 등장, 1945-1947’(The Origins of the Korean War: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상권을 저술한데 이어 1990년 ‘폭포의 큰울림, 1947-1950’(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이라는 부제가 달린 하권을 출판했다. 

    그는 이들 책에서 △해방 당시 한국은 사회혁명(social revolution), 다시 말하면 계급혁명이 성취될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으며 △외세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사회혁명은 성공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38선 획정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물론, 단독정부 수립에 의한 남북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한 지도자와 남한 정부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시종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북한 정부와 지도자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로 일관했다. 그는 1948년 5월10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를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은 정통성을 결여한 정부, 즉 일종의 괴뢰정부로 간주했다. 

    그러면서도 김일성과 북한정권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었다. 그는 김일성이야말로 1930년대에 한․만 국경지대에서 독자적으로 항일 게릴라전을 이끌어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린 독립 운동가라고 평가하면서 그를 이승만 내지 임정계통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앞지르는 ‘민족주의자’로 추켜세웠다. 

    커밍스는 김일성이 소련군 장교가 아니며 또한 김일성의 집권을 가능케 한 것은 소련군의 후원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33세의 젊은 김일성을 마오쩌둥, 호치민(胡志明), 티토(Josip Broz Tito)등에 비견시켰다. 나아가 커밍스는 “북한은 결코 소련의 괴뢰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1946년 이후 북한정권이 추진한 ‘민주개혁’이야말로 해방 당시 조선민중이 갈망했던 사회혁명의 기대를 충족시킨 것이었고, 1950-1960년대 북한이 이룩한 경제성장은 전세계 사회주의권의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6․25 전쟁의 발발 배경과 관련, 1950년 1월 12일 ‘미국은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선언을 한 국무장관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이 한반도에서 ‘먼저 공격하는 측이 큰 실수를 범하도록 만드는 방어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대한정책을 오판, 남한을 침공토록 부추긴 것으로 추론했다. 동시에 그는 1950년 5. 30 선거후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이 자구책으로 미국의 군사개입을 얻어내기 위해 ‘북진통일’의 명목하에 남한 군대로 하여금 옹진반도를 먼저 침공하게 했을 것이라고 추단했다. 한마디로, 그는 6․25 전쟁의 도발책임을 은근히 미국 및 남한측에 전가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북한이 6․25 전후에 중공으로부터 상당한 인적 지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지만 소련으로부터는 아무런 실질적 원조를 받지 않았다고 강조함으로서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없이 거의 독자적으로 ‘민족해방전쟁’을 수행하려 했다고 보았다. 

    커밍스의 주장에 대한 한국 학계의 초기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커밍스의 논저들은 반공이데올로기 일색이었던 한국 지성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고조되고 있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및 반미운동과 맞물리면서 진보적인 사회과학자들과 민중사학자들간에 탐독․원용됨으로써 198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를 휩쓴 ‘지적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그의 연구방법론은 한국현대사의 연구와 서술양식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초래했던 것이다. 특히 최장집은 ‘상권’을 “한국현대사 연구에 있어 우리에게 거대한 충격을 준 이정표적 대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커밍스의 저작은 무엇보다 연구방법론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그의 연구는 신좌파의 이론적 대변자답게 철저히 네오마르크시즘의 이념적 편향성을 띠고 있다. 그는 자신의 논지를 폄에 있어 결론을 미리 상정해 놓고 이에 맞추어 가설을 세우고 사료를 선별․동원하는 방식 즉. ‘꿰어 맞추기 식’으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해방 당시 한국은 사회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난숙(overripe)되어 있었다”라는 명제를 도출하고 있으나 만약 이 시기 일제 총독부가 한국인에게 강요했던 반공적 내용의 교육 및 정치선전 등을 심각히 고려했더라면 그의 결론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둘째, 커밍스의 논저는 이념적으로 편향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판단 등에 있어 균형감각을 결여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추적함에 있어 전쟁의 외적 요인을 경시하고 내적 요인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한국전쟁은 내전’이라는 무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커밍스는 미국의 대한정책(對韓政策)에 대해서는 철저히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소련의 대한정책에 대해서는 분석과 비판을 소홀히 했다. 그는 남한의 좌익세력이 추진한 ‘사회혁명’에 대해서는 긍정 일변도로 서술하면서 우익세력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부정 일변도로 취급했다. 그는 남한정부와 그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비판적이면서 북한․소련 및 중공정부와 그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갔다. 

    셋째, 자료의 편향적․제한적 이용이 문제였다. 커밍스는 그의 논저에서 문헌과 통계자료 등을 아전인수 격으로 선별․활용했다. 한글자료의 경우, 남한의 공문서나 자료들은 외면하면서 북한측의 자료는 김일성의 연설문이나 로동신문 논설 등을 아무런 사료비판 없이 풍부히 인용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논지에 맞지 않는 자료나 문헌 또는 증언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시하거나 “믿을 수 없다” “조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일축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자료들이 왜 믿을 수 없는지, 어떻게 조작된 것인지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소련측의 기밀자료가 속속 공개되고 소련의 대한정책에 관한 연구가 활기를 띰으로써 한국현대사,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된 커밍스의 주장이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등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미 펜실베니아대 명예교수 이정식은 2차대전 직후 스탈린의 대중국정책의 변화와 19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런던에서 열린 외상회의에서 빚어진 미-소간의 심각한 외교마찰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스탈린은 해방 후 1945년 10월말 즉, 모스크바 3상회의 이전부터 이미 남북한의 재통합을 포기하고 북한에서 소련의 국익을 일방적으로 도모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1947년 미국정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한 나머지 남한에서 조속히 철군하기 위해 미군정의 ‘한국화 정책’을 서둔 끝에 1948년에 유엔을 통해 대한민국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정식의 주장은 “미국이 한반도 분단고착화에 1차적 책임이 있다” “미국이 남한을 반공보루로 만들기 위해 대한민국을 세웠다”는 등 커밍스의 이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중앙일보사 현대사연구소가 발굴, 1995년에 보도한 ‘스티코프 비망록’에 따르면 1946년의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추수폭동)은 당시 평양에 주둔했던 소련군 최고실력자 스티코프(Terentii Shtykov, 연해주 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가 500만원의 자금을 조달해 성사시킨 사건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9월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한 소련의 개입이 명백해진 만큼 커밍스 같은 수정주의자들의 남북한 현대사 서술은 일대 수정이 불가피하다. 

    더구나 김일성이 해방 후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귀국했으며 귀국후 소련군 정치장교들의 지원하에 권력기반을 굳혔으며 스탈린의 직접 지령을 받아 집권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도 커밍스는 이를 애써 외면했다. 한편 미국의 소련전문가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는 1993년에 입수한 소련공산당과 외무부의 내무 기밀문서에 근거하여, 해방 후 북한의 국가형성에 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은 거의 전적으로 소련군 장교들이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들을 직접 보고 온 웨더스비에 의하면, 김일성은 6․25 전쟁 1년 3개월 전부터 남침을 하락해 달라고 스탈린에게 졸랐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의 참전과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해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래도 김일성은 미국 참전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일단 남침을 시작하면 몇 주 내로 남반부를 완전 점령하겠다고 장담하면서 계속 남침 허락을 졸랐다. 마지못해 스탈린은 1950년 초 남침을 승인하고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북한으로 보냈다. 따라서 김일성이 소련의 후원없이 독자적으로 집권한 ‘민족주의적’ 정치가라는 커밍스의 주장은 오류로 판명된 것이다. 

    1994년 당시 우리 외무부가 러시아 외무부로부터 인수받은 ‘러시아 6․25자료’를 검토한 김학준은 6․25전쟁의 발발과 관련, 김일성과 박헌영이 늦어도 1949년 1월부터 남한에 대한 전면적 침공계획을 세워놓고 이에 대한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를 얻기 위해 모스크바를 적어도 두 번(1949년3월과 1950년4월), 북경을 한 번(1950년 5월)방문하여 소련 및 중공 지도자와 만나 적극적인 설득작업을 벌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스탈린은 1949년 3월5일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북한의 남침계획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신중한 반응을 보였지만 1950년 4월 다시 만났을 때는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다” 면서 ‘북조선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으로 부터도 반드시 ‘남침’동의를 받으라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6.25전쟁을 불과 40일 앞둔 1950년 5월 14일 김일성과 만났을 때 먼저 스탈린의 태도를 확인한 다음 “만일 미국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김일성은 스스로 ‘옹진반도작전’이라는 것을 개시한 다음 곧바로 서울을 침공하고 서울 점령이 성공하면 남한 전체를 공산화하려고 했다. 이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취한 군사적 행동은 남한 전체의 점령과 공산화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100% 뒤엎는 것이다. 김학준은 이상과 같은 사실 확인에 따라, 한국전쟁은 분명히 북한의 잘 준비된 전면 남침에 의해 일어났으며 남한의 단독결정, 또는 미국과 남한의 공모 또는 유도 등에 의해 일어났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그 근거를 찾기 힘들다고 밝히면서 “전통주의자들 내지 신전통주의학파의 해석이 진상에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1996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Ⅰ, Ⅱ’를 펴낸 박명림은 한국전쟁의 배경과 관련된 국내외의 주요문서를 철저히 검토한 끝에 6․25전쟁 발발과정에 대한 커밍스의 주장이 거의 다 오류였음을 밝혀냈다. 그는 한국전쟁은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이 군사적 수단을 사용, 남한과 북한을 통일하려는 의지에서 구상하게 된 소위 공동작품이며, 이를 스탈린에 제의하여 동의를 얻은 다음 이어 중국의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최종적인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가능했던 ‘침략전쟁’으로서 “단순한 민족해방전쟁이나 내전이 아니었다”고 결론지었다. 

    한국현대사에 관한 수정주의자들의 논저는 주로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두고 집필된 것들이었다. 특히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에 관한 논저들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비판하는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서 한국 ‘민중’에 대한 강렬한 연민의 정을 밑바닥에 깔고 서술돼 있다. 미국 수정주의자들의 저술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반미․반제의 비판의식과 약소국 민중에 대한 동정적 관심이야말로 1980년대 한국의 진보적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대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감정적인 역사서술이 호소력이 있을지는 모르나 이는 객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역사는 아니다. 1950-1970년대 초 미국 외교사학계의 일개 비주류 학풍에 불과했던 수정주의가 한국에서는 1980-1990년대 초에 걸쳐 아무런 비판없이 현대사 연구의 주류학풍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국내 학계에도 큰 책임이 있지만,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기술에 오류와 왜곡이 가득하다면 이는 한국민은 물론 전세계인을 ‘미스리딩’(misleading)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 커밍스의 한국전쟁 연구는 국내외 학계로부터의 거의 외면되고 있다. 한국전쟁은 커밍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어느 날 우연한 기회를 빌미삼아 확전된 것이 아니라, 북한정권 수립과 함께 등장한 소위 국토완정론에 입각하여 계획적으로 준비된 것이다. 전쟁의 원인은 혁명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군사적 급진주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과 소련은 처음부터 오히려 남한의 선제공격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커밍스가 중시하는 남한의 도발이나 미국의 유도 혹은 음모는 그 의미가 저절로 상실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자, 커밍스 조차도 1997년 봄에 펴낸 그의 신저 <한국이 차지할 양지-근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에서 ‘내전’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은 유지하면서도 김일성의 책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가 1860년부터 1996년까지의 한국근현대통사를 담아 펴낸 527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김일성은 한국에서의 내전이 전면전 수준으로 상승하는 데 대한 중대한 책임이 있다”(Kim Il Sung bears the grave responsibility for raising the civil conflict in Korea to the level of general war)라고 선언했다. 1981년과 1990년 상․하권으로 냈던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했던 수정주의 학설에 대 수술을 가한 것이다. 

    커밍스 조차도 종전 학설을 수정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북한과 남한의 눈먼 수정주의사관 추종자들이나 친북수구좌파들만이 6·25전쟁을 ‘통일을 위한 내전’이니, 민족해방전쟁이니, 통일전쟁이니, 김일성을 역사가 평가할 문제라는 등의 발언을 서슴지 않아왔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주장을 세계 학계에 내밀지도 못한다. 비웃음만 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역사관을 국내용으로만 팔아먹고 국민을 속이고 있다. “남의 집 싸움인 통일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 달 안에 끝났을 것이다. 생명을 박탈당한 400만명에게 미국은 원수다”라고 말하는 강정구 교수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11월 20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가진 동포 간담회에서 “우리가 옛날엔 식민 지배를 받고 내전도 치르고 시끄럽게 살아 왔는데 지금은 여러 나라를 돕고 있다”며 6․25전쟁을 ‘내전’으로 표현했다. 당시 청와대는 “동족 간에 전쟁을 치렀다는 점에서 우리와 캄보디아 역사의 공통점을 얘기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것은 이 나라 안보를 책임지는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6․25전쟁에 대해 갖고 있는 역사인식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역사관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내전이란 말을 쓰게 되면 북한의 침략으로 일어난 6․25전쟁의 책임을 남북이 나눠져야 한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 사상 최대의 비극이다. 전쟁 발발 직후 소련은 그들의 전쟁 개입을 은폐하기 위해 6․25전쟁을 공식적으로 ‘내전’이라고 불렀고 이때부터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y Gromyko)소련 외무차관은 앨런 커크(Allan Kirk)소련주재 미국대사에게 남한이 38선상에서 먼저 국경분쟁을 유발하여 북한이 반격을 가하면서 전면전으로 비화됐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전쟁 개입 사실을 은폐하고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워 유엔과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6․25전쟁을 ‘내전’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이 붕괴된 오늘날 소련. 중국의 지도자들까지도 대부분 더 이상 한국전쟁을 ‘남조선해방을 위한 내전’으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은 장관 내정자 시절인 2006년 11월 1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6․25전쟁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여기서 규정해서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가 국회의원이 계속 따지자 “남침이라는 사실은 이미 규정돼 있는 것”이라고 마지못해 고쳐 말했다. 그는 또 서면답변에선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며 아직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국민과 수백만 호국영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6․25전쟁 이후 징집된 1천여만명의 대한민국 장병이 조국을 위해 역적행위를 했다는 얘기로도 들릴 수 있다. 남의 집안싸움에 괜스레 유엔의 이름으로 21개국이 끼어들어 통일도 방해했고 희생만 키웠다는 논리다. 

    소위 한국 현대사 연구를 자부하고 있는 일부 국내교수들도 38선의 생성과정과 6․25전쟁 발생 과정을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일주일을 남겨놓고 1945년 8월8일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독일군과 싸우느라고 기진맥진한 소련은 태평양전쟁에 뛰어들 여력이 없었지만 이틀 전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 참전한 것이다. 물론 소련은 앞서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의 양해하에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차지하고 중국의 부동항 다이렌(大連)과 뤼순(旅順)을 장기간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참전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8월9일 나가사키에 또 원폭이 투하되자 일본은 항복을 결심했고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은 거의 저항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만주와 한반도로 밀고 내려왔다. 미국은 소련과의 사이에는 한반도를 함께 해방시킨다는 막연한 약속이 있었지만 소련이 너무 급속도로 한반도에 진입하자 미국은 당황했고 제동을 걸었다. 

    8월11일 새벽 미 국방부 작전국 소속 딘 러스크(Dean Rusk, 후에 국무장관)육군 대령과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대령은 한반도에 적당한 선을 그어 소련의 급속한 남진을 저지하라는 상부 지시를 받고 지도를 꺼냈다. 두 대령은 처음엔 북위 40도선을 고려했으나 너무 북쪽이라 소련측이 거부할 것 같아 한반도 중심을 관통하는 38도선을 택했다. 수도 서울과 일본군의 미군포로 수용소가 38도선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38선은 적당하게 보였다. 미국은 즉각 소련에게 38도선까지만 내려오라고 권고했고 소련은 이를 수락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이 종전 직후 일반명령 1호로 38선의 존재를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국내 친북 좌파들은 “맥아더가 38선 분단 집행의 집달리였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마치 미국이 이유 없이 38선을 긋고 한반도를 분단시키기나 한 것처럼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선동하고 있다. 미국이 그때 38선을 긋지 않았으면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동북아의 위성국가로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 각국을 위성국가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동북아의 요충 한반도를 위성화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38선을 획정, 한반도를 분단시킨게 아니라 38선을 그었기 때문에 남한만은 적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도 미국이 38선을 그어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친북좌파들은 공산주의도 좋으니 6․25전쟁 때 김일성의 통일 실패가 원통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절대 다수는 지금도 공산주의 체제하에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공산주의 시조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1848년 런던에서 발표한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Manifesto of Communist Party)의 마지막 대목에는 “They(communists) openly declare that their ends can be attained only by the forcible overthrow of all existing social conditions. Let the ruling classes tremble at a Communistic revolution. The proletarian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They have a world to win. Workers of all lands, unite!”(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그리고 런던의 ‘하이게이트 묘지’(Highgate Cemetery)에 안치된 마르크스의 대형 대리석 묘비에는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이라고 적혀있다. 마르크스의 선언문과 비문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폭력혁명을 통해 세상을 공산주의로 바꾸자”는 것으로 정리된다. 한국전쟁은 이래서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갖는 전쟁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100여년만에, 그리고 냉전의 시작과 함께 드러난 공산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기념비적인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준 세계사적 이정표이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1950년에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 안정과 평화유지의 핵심 버팀목인 한미안보동맹은 바로 6․25를 통한 한미 양국군의 피로 맺어진 희생의 산물이었다. 지금 우리가 한반도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은 남한의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도 아니며, 북한에서 말하는 ‘우리민족끼리’의 민족공조나 핵을 앞세운 선군정치도 아니다. 그것은 한미동맹을 통한 전쟁억지력이다. 

    대한민국은 반세가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유를 지키며 가장 괄목할만하게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세계의 모델국가다. 이제 6․25전쟁 58주년과 건국 60년을 맞는다. 제발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니, 그리고 대한민국을 실패한 역사라고 하면서 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얘기들은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