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슨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국에 있는 어느 미국인이 근자에 이런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올림픽 성화봉송이 미국과 관련돼 한국내 미국인이 지난번 중국인이 했던 것처럼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모르긴 해도 그렇게 유야무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마도 한국은 '촛불'로 뒤덮였을 것이고 곳곳에서 보복행위가 없었으리라고 장담하기 힘들다.

    이런 질문을 듣고 최근의 쇠고기 수입 파동을 겪으면서 우리에게 '미국'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미국'은 한국 사회에서 번번이 정치문제로 변질되고 곳곳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아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다른 나라가 했더라면 그냥 넘어갈 것도 '미국'이 관련됐다 하면 좌파가 걸고넘어지고 마치 그것이 '리버럴한' 사고 방식의 발로인 양 그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곤 했다. 솔직히 쇠고기 수입국이 미국이 아니고 영국이나 프랑스 또는 중국·일본이었다 해도 이처럼 '우리 국민 다 죽인다'며 연일 비난폭탄을 퍼부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미국'을 빼놓고는 말하기 힘들고 어렵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민도 미국으로 가고, 공부도 미국에 가서 하고, 사업도 미국과 하며, 놀기도 미국에 가서 한다. 아마도 두 집 걸러 한 집씩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미국과 얽혀 있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다. 속으로는 미국을 좋아하면서 입으로는 욕하고, 개인적으로는 미국과 친하면서 나라 전체로서는 미국을 못마땅해한다. 이런 이율배반이 없다.

    이런 정서의 뿌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매일이다시피 '미국'과 접하면서 미국이 우리에게 갖는 우월적 지위 내지 정서를 너무 많이 알게 됐다. 그러면서 우리가 약소국이고 동맹수혜국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피해의식을 갖게 된 측면도 있다. '미군 주둔'은 수용하면서 '미군'을 둘러싼 갈등과 잡음을 확대 재생산했다. 그런 것을 악용한 것이 북한이고 친북세력이다. '미국'이 한반도 모든 '잘못'의 근원이고 제국주의적 침략세력이라는 저들의 주입 또는 세뇌작업이 주효한 측면이 있다. 좌파단체와 이에 동조하는 일부 시민세력은 끊임없이 미군의 한국 철수를 주장해 왔다. 북한의 요구 그대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매듭지을 것이 있다. 더 이상 시도 때도 없이 미국문제 또는 반미정서로 시간을 낭비하고 그로 인해 사회통합을 저해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한미군' 문제로 사사건건 한국사회가 시끄럽고 '촛불'이 난무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사회적 장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 안목으로 원칙을 정하고 문제를 정리해 나가야 한다. 주한미군의 기능이 수명을 다했다는 데에 국민적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면 그에 따른 대비를 차근히 해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자력국방에 따른 자신감과 재정적 부담에 군말하면 안된다. 일부에서는 미군의 한국 주둔이 우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전세계적 전략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두 가지를 요청할 수 있다. 철수를 요청하든가 아니면 주둔비용을 미국이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성 때문에 주둔하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미국을 '동네북' 취급하듯 하는 좌파세력의 선동에 떠밀려 다니기 전에 미국과의 관계에서 받을 것과 줄 것의 순위를 인정하는 실용주의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 미군은 미군대로 그냥 놔두고, 반미감정은 감정대로 표출하는 것은 너무 이중적이고 자기위주적이다.

    우리의 대미정책과 미군주둔 문제는 대통령에 따라, 정권에 따라 그 강약을 달리해 왔다. 그러나 미국문제는 결코 정권차원에서, 한 대통령의 이념 차원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안보의 문제고 나라의 근간의 문제다. 따라서 우리 모두도 '정서'나 '감정'으로 다루기보다 우리 실익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우리의 '정서'를 정리할 때다.

    '미국인들이 난동 부렸더라면…' 하는 미국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중국이 무섭다. 중국은 우리 4000년 역사에 노상 우리를 깔고 앉아 우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미국은 무섭지 않다. 미국은 미국인들이 난동자로 몰려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 유학생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고 우리를 쳐들어와 점령할 나라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럼 우리도 무섭게 하면 되겠군" 했다. 그 말의 속뜻이 '철군'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