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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4일자 '오피니언'면에 김대중 고문이 쓴 '김대중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제 출범한 지 한 달 남짓한 이명박 정권의 앞날이 심상치 않다. 이 대통령 자신이 왜 국민이 자신을 압도적 표차로 선택했는지를 잊은 것 같고, 국민들도 우리가 과연 정권을 교체했는지를 잊고 있는 것 같다. 불과 3개월 전 우리 사회의 화두였던 '잃어버린 10년', 좌파정치의 종식, 경제살리기 등의 명제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공천과 인사를 둘러싼 정치 싸움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이 대통령과 새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의 정치력 부재(不在)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정치력 부재는 용인술(用人術)의 빈곤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장관 등 고위공직자를 기용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상처를 입었고 국회의원후보 공천과정에서도 문제를 야기했다. 문제의 핵심은 '물갈이론(論)'이고 문제의 결함도 거기에 있다.
누군가 정치의 물갈이를 어항의 물갈이에 비유했다. 어항의 물을 일정 비율로 갈아주듯이 정치의 물갈이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에는 당의 원로라고도 할 수 있고 다선(多選)의 경험자로 불릴 수 있는 '윤활유'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신(新)과 구(舊)의 다리 역할을 하고 당내 이견을 조정하며 상대당과 막후협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영향력과 경험과 신뢰의 집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물갈이에 몰입한 나머지, 충격 내지 이견 완화장치마저 없애버린 꼴이다. 이렇게 되면 가뜩이나 결벽증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 정치는 완충없는 정면 박치기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앞으로 이 대통령의 대(對)국회 대(對)야당 정치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게다가 공천은 당내에 많은 반대자 또는 비주류를 양성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대선 때 간신히 봉합된 당내 세력들은 이번 공천과정에서 더욱 첨예하게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공천에서 탈락해 당을 떠난 사람들의 행보 여하에 따라, 또 대선과정에서 새로 영입한 사람 또는 세력들의 결집 여하에 따라 당은 사분오열 될 수 있는 소지를 안게 됐다. 이것은 앞으로 이 대통령의 당 통제능력을 상실하게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단임 대통령은 당선 그날부터 레임덕'이라는 말이 있는데 한나라당은 총선 직후부터 '5년 후의 싸움터'로 바뀔 것이다. 어제 있었던 박근혜 전 대표의 회견은 그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비해 통합민주당은 비교적 재빨리 대선의 공황(恐慌)에서 벗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공천을 둘러싼 이미지 싸움에서도 한나라당을 눌렀다. 기실 DJ계 10여 명 정도를 자르고는 노무현 정권의 저변을 형성했던 이른바 친노 '탄돌이'들이 거의 대부분 생환했는데도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은 '영웅'이 됐다. 35% 수준의 물갈이를 하고도 내홍(內訌)은 커지고 반목은 심해진 한나라당에 비해 민주당은 당명과 '대표'만 바꿔 달았을 뿐(그나마 지역구에서 떨어지면 자동 아웃 될), 실질과 내용 면에서 열린우리당과 달라진 것이 없다.
이 대통령의 리더십에 어떤 진수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리더십의 진수는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요즘 그의 행보를 보면 단지 정부의 CEO로만 여겨진다. 정치력을 지닌 국가의 지도자라기보다 브리핑 잘 받고 '지시' 잘 하는 행정가의 면모만 보일 뿐이다. 당의 문제에 간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문제고 속으로 깊이 간여한 결과가 이것이라면 그것도 문제다. 그가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통령은 자신이 현대의 CEO일 때처럼 '앞에서 끌면 따라온다'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소탈하고 모범을 보이고 다른 문제의 허점을 잘 짚어주는 지혜를 보이면 온 국민이 감동하리라고 믿는다면 그는 시대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 대통령은 개인이 잘나서 되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지난 대선이 한국정치의 진로와 방향을 결정한 것으로 생각했고 이미 그 방향이 정해졌다고 막연히 믿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작금의 여야 속사정을 감안하면 지난 12·19대선은 전초전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정치적 선택은 4·9총선에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역설(逆說)을 깨닫게 된다. 결국 대통령 한 사람만 바뀌었을 뿐, 한나라당의 분열 민주당의 건재 제3·4당의 출현 등으로 지난 대선의 선택은 어느 면에서 퇴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