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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한 물적 위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체계의 위기가 … 모든 문제의 근본이다. - 제이콥 니들먼(Jacob Needleman, 미국 철학자)
저는 정치권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늘 해 왔었습니다. 진보 진영은 ‘관념의 과잉과 실천력의 빈곤’이 문제이고, 반대로 보수 진영은 ‘실천력에 비해 가치의 빈곤’이 문제라는 점 말입니다.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대체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각각의 정치 세력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권자들이 여러 정치 세력을 놓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경계선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념 또는 가치라 부를 수 있습니다.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고 ‘경제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탈(脫)이데올로기가 시대적 대세처럼 굳어졌습니다. 어떤 정치학자는 ‘역사의 종말’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거대담론은 박물관으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등 어떤 단일한 가치체계로 인류사회를 유토피아로 이끌려고 하는 실험은 분명 실패했고, 앞으로도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치에 있어 가치체계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열려 있고 탄력적인 가치체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회주의는 극단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파시즘도 그랬고, 일부 종교의 원리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진보 세력과 중도개혁 세력이 작년 대선에서 참패를 면치 못한 것도 ‘자신만이 옳다’는 근본주의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한나라당에 부족한 2%를 들라면, 앞서 언급한 가치의 빈곤입니다. 보수 정당이 대체로 그런 경향입니다만, 한나라당은 더 심한 편입니다. 아마도 전문가 위주의 인사들이 당에 많이 들어오다 보니 ‘숲’보다는 ‘나무’를 중시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정치가 국민에게 서비스하는 것은 좋은 정책을 통하여 하는 것이고, 좋은 정책은 좋은 가치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은 좋은 가치체계를 만들어낼 책무가 있습니다.
이명박 새 정부가 ‘실용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명박 당선인의 특성에도 맞고 시대정신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실용주의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이명박 당선인이 추구하는 실용주의는 ‘좌·우 양 극단을 배척하고 오로지 국리민복의 관점에서 탄력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태도의 문제이지 노선의 문제는 아닙니다. 가치체계가 빠져 있는 실용주의는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수위원회가 출범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이나 인수위원회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고, 창의적이고 참신한 측면도 더러 보입니다. 하지만 점점 국민들의 신뢰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과잉 의욕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고, 10년 만의 집권이고 당선인의 정치적 기반이 넓지 못해서 오는 인재 풀의 한계에서 연유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엇보다도 인수위원회가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수위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명박 정부의 가치체계를 세우고, 이 속에서 국정 의제의 우선순위를 배열하는 것입니다. 가치체계가 부재하다 보니 설익은 정책들을 경쟁적으로 남발하는 형국이 되고 새 정부의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인수위원회는 지금부터라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그 동안의 활동을 평가하고 남은 기간 이 점들을 보완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인수위원회의 혼선은 테크닉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의 문제이며, 마인드의 문제입니다.
<객원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뉴데일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