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올 말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폭정의 도구를 ‘인민주권’의 전당으로, NLL 영토 개념을 ‘국민 오도(誤導)’로, 그리고 북한의 개혁 개방 촉구를 적절치 못한 것으로 치부할 정도에 이르렀다면, 대한민국을 왜 세우고 지켰는지의 그간의 이유는 완벽하게 소멸당한 셈이니 말이다.

    더 난감한 것은 야당과 대중여론 역시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대원칙’을 확고히 지키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야당은 이러한 동향에 대해 당당한 대항논리를 세우기보다는 ‘수구 꼴통’으로 찍힐까 봐 전전긍긍 떨고 있고, 대중여론도 ‘총론 찬성, 각론 비판’이라고는 하지만, 정상회담 직후에 노무현씨에게 50%에 가까운 지지율을 표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다 끝난 것 아닌가?

    정권, 야당, 대중이 모두 이런 식으로 몰려간다면, 다음에 닥칠 사태는 불을 보듯 훤하다. 한미동맹의 시체(屍體)화, 미군 철수, 연방제, 친북정당 사회활동의 완전 합법화, 김정일 비판세력 숙청, 대한민국의 척추 마비…가 바로 그것이다. 설마 경제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이 체제가 북한처럼 거덜난 체제에 그렇게 쉽게 당할까 하는 것이 그간의 우리 사회 지식인 사회의 ‘진보적’인 낙관이었다. 그러나 경제에서는 이겼어도 정치에서는 질 수 있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경험법칙이었다.

    지난 10년은 바로 그런, 경제에서는 이겼어도 정치에서는 진 역설의 과정이었다. 6·25 때 소멸당한 극좌 흐름이 1980년대에 부활했다가, 1990년대에는 정권에 편승했고, 2000년대에는 정권의 실세로 등장했다. 그들은 국회, 행정부, 권력기관들을 하나하나 접수해 나갔고, 대중매체와 문화권력을 삼켰으며,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물구나무 세워 서울 한복판에서 빨치산, 남파 공작원까지 ‘민족 민주 열사’로 추모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햇볕정책’도 북한의 개혁 개방을 지향한다던 당초의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김정일 폭정에 봉사하는 일방적 ‘보급 투쟁’임을 공공연하게 자처하고 나섰다.

    이 기간을 통해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구사한 전략 전술은 속임수와 협박이었다. 속임수란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민족주의’와 ‘외세배격’이란 명분으로 전파하는 수법이었고, 협박이란 지식인들을 겁 먹여 그들의 입을 봉하는 수법이었다. 그들의 이런 수법은 거의 완벽하게 먹혔다. 일부 청소년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식민지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려 하고, 일부 지식인들도 생활양식에서 전혀 ‘진보적’이지 못한 위인들까지 ‘좌파 민족주의’와 ‘우리 민족끼리’ 운운에 변죽을 울려야만 행세할 수 있는 것처럼 돼 있다.

    그러나 이번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 더 현저해진 것은 단순한 속임수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양 아예 ‘드러내놓고’ 말하기로 작심했다는 점이다. “북한 핵, 납북자, 국군포로, 북한인권, 상호주의는 입도 벙긋하지 말고, 서해 울타리와 안보 장치는 무주공산으로 비워 버리고, 국민세금 왕창 뜯어 무제한 퍼주겠다”며 “어쩔래?” 하고 나오는 판이다. 문제는 이런 반역적(叛逆的) 사태가 선거 판에서조차 전혀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그래도 좋다는 뜻인가, 아니면, 속수무책이란 뜻인가?

    이쯤 되면 국기(國基)가 걸린 중대사와 관련해 누구를 꼭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는 차별적 선택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아리랑 축전 식 ‘우리 민족끼리’에서는 여당과 준(準)여당만 보일 뿐 야당다운 야당이 보이지 않으니, 거기서 누구를 뽑은들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경제, 교육, 과학기술, 물론 다 중요하다. 그러나 국방, 안보, 대북 정책은 ‘중요’를 넘는 ‘치명’적 사항이다. 그럼에도 이 사활적 문제와 관련해 ‘2007 대선’은 누구든지 연필 굴려 대통령 시켜도 그만일 ‘의미 없는 선거’로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