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가 쓴 '평화 없는 평화선언을 경계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가 평화협정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듣고 ‘시드니 사건’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7일 시드니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체제나 종전선언에 대해 분명히 말하라고 다그쳤다. 그는 한국 국민이 그 말을 듣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사실은 노 대통령보다 먼저 발언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새로운 안보체제(Security arrangement)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그걸 통역이 빠뜨렸다. 노 대통령의 성화에 부시 대통령은 한국전쟁을 끝내는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인가는 김정일에게 달렸다고 말했다. 미국 측 통역은 ‘평화조약 서명’이라는 말을 ‘평화체제 제안’으로 옮겼다. 영어를 못 들은 노 대통령은 그 말이 그 말이라면서 이번에는 김정일까지 끌어들여 “김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들은 그 얘기를 듣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이 짜증을 냈다. “더 이상 어떻게 분명히….” 

    청와대와 백악관은 이 사건을 통역 실수로 일어난 해프닝으로 해명했다. 대부분의 언론도 수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춰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이나 평화선언에 서명하고야 말겠다는 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다. 백악관 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담당 보좌관을 지낸 마이클 그린의 말을 들어 보자. “노 대통령은 부시에게 평화조약과 비핵화를 연계시키지 않겠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했다. 노 대통령은 원하지 않은 답을 들었다. 비핵화와 평화조약이 연계되어야 한다는 점이 미국 대통령에 의해 세계 앞에 명확해진 것이다.”(본지 9월 12일자 34면) 그래도 노 대통령은 김정일 대변인 노릇은 잘 했다.

    김정일과 평화에 관한 선언이나 협정에 서명해 평화 대통령으로 청사(靑史)에 이름도 남기고 12월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는 나흘 뒤에 확인됐다. 노 대통령은 신정아·정윤재 스캔들을 해명하러 기자실에 들러 이렇게 말했다. “이제 평화선언도 있을 수 있고 그걸 위한 협상의 개시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제안할 생각이 있느냐의 수준이 아니라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핵심과제다.” 그는 노·김 회담에서 핵 문제를 논의하라고 하는 것은 “가서 싸우고 오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핵 문제는 6자회담에서 잘 풀리고 있으니 자신은 평화체제에만 매달리겠다는 태도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하루 뒤에 평화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전선언을 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한 것을 보면 노 대통령은 참모들의 건의를 무시한 것이 분명하다. 남북 간에 신뢰구축도, 군사적인 긴장완화 조치도 없는 지금 평화선언이나 평화협정 체결은 유엔군 사령부와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된 혼란을 부를 뿐 아니라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핵 해결 없는 평화선언은 미국과의 충돌코스이기도 하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도 남북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실현시키려는 노력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의 중요성이 희석될까 걱정이라는 논평을 보내 왔다. 연내에 핵 불능화가 성사돼도 폐기까지는 산 넘어 산이다.

    노 대통령은 비핵화에 대한 김정일의 책임 있는 언질을 받아내 6자회담에서의 핵 문제 해결을 지원해야 한다. 핵을 해결하라는 게 아니다. 핵 문제를 거론할 경우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운가. 한국의 기득권층과 미국을 몰아붙일 때의 돌격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평화의 대전제가 되는 핵 논의가 두려우면 평화 논의도 포기할 일이다. 평화 없는 평화체제는 기관(器官) 없는 신체다. 신정아 사건과 관련해 그는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자신이 무너졌다고 고백했지만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민족적·국가적·세계적인 중대사에 대한 그의 판단력은 더 심각하다. 그의 평양 길이 너무 위태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