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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7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주용중 정치부 차장대우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대선후보와 박근혜 전 대표가 만날 예정이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따로 만난 적은 없다. 공식행사에서 함께 봤을 뿐이다. 지난 4월 말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이 책임론에 휩싸였을 때 “서로 대화하자”고 운을 뗐으나 흐지부지됐다. 두 사람이 어울리는 타입은 아니다. 이명박은 화성(火星), 박근혜는 금성(金星) 출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은하(銀河)에서 온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박 전 대표가 깨끗하게 승복하고 이 후보가 화합을 얘기해도 글쎄,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초장부터 깨질 사이는 아니다. 끌리는 만남보다 질긴 것이 필요에 의한 만남이다. 이 후보는 박 전 대표를 내치면 대통령 당선이 어렵다. 박 전 대표는 이 후보를 뿌리치면 자신의 상표인 ‘원칙’이 보잘것 없어진다. 일단 모양새는 서로 좋게 가져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아무리 좋은 포즈를 잡는다 한들 포즈는 포즈일 뿐 그것이 곧바로 실질적 협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의 틈새는 단숨에 건너 뛰기에는 그만큼 넓고 깊다.
첫째, 두 사람이 서로 잰 마음속 거리가 1m라면 의원급에선 10m, 캠프 실무진급에선 100m, 팬클럽으로 내려가면 1㎞ 이상 서로 까마득하게 벌어질 것이다. 벌써부터 양측 의원들 사이에선 “점령군이냐” “먼저 반성하라” 설전이 한창이고, 팬클럽들은 “경선무효다” “도발하지 말라” 대치 중이다. 이 후보와 박 전 대표가 웬만큼 융합하지 않고선 양 캠프 간 앙금을 녹이기 어렵다.
둘째, 양 진영에서 서로를 저울로 다는 무게가 너무 차이 난다. 이 후보측의 이재오 최고위원은 “선대위원장을 몇 분 모시는 데 제1순위로 박근혜 의원에게도 부탁해야 되지 않겠느냐” “패자는 패자 진영대로 두면 된다. 정권교체는 승자를 중심으로 해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박 전 대표는 ‘원 오브 뎀(one of them)’으로 대우하되 박 전 대표 진영은 굳이 파트너로 삼기 어렵다는 얘기다. 반면 박 전 대표 캠프에 몸담았던 핵심인사들은 “우리를 선거인단 투표의 승리자로 예우하지 않으면 돕기 어려운 것 아닌가. 저쪽에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본 뒤 우리는 함께 행동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후보측과는 승패에 대한 인식부터 다를 뿐더러 순순히 각개격파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단단하다.
셋째,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두 주인공은 옥신각신, 미로를 헤매다 도킹하는 데 12년이 걸리지만 이 후보와 박 전 대표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12월 19일 대선까지 4개월도 남지 않은 사이에 결판을 내야 한다. 서로 뜸을 들일 여유조차 없는데 손을 잡고 전국을 누벼야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더구나 박 전 대표는 “이 후보로는 안 된다”고 말해왔다.
한나라당의 이런 사정을 꿰뚫어 보는 범여권 주변에서는 대선 후 한나라당 분당설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결국 이 후보와 박 전 대표의 첫 만남은 한나라당 운명을 가늠하는 시험대이다. 열쇠는 이 후보가 쥐고 있다. 이 후보는 박 전 대표를 만나기 전 이재오식 강경노선을 택할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박 전 대표와 당장 흥정하자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박 전 대표가 2002년 탈당했다가 복당할 때 한 측근이 이회창 후보로부터 총리나 당권 보장 등 약속을 담은 문서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건의하자 박 전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분이 왜 그리 쩨쩨해요. 그런 문서가 100만장 있어도, 믿음 없이 무슨 소용 있나요?”
한 사람의 마음 얻기가 천하를 얻기보다 힘들 때가 있다. 이 후보는 CEO로는 해보지 않았을 그런 협상, 그런 고비 앞에 지금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