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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에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서강대 겸임교수)가 쓴 시론 '풍습을 바구어야 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깨끗한 승복과 아름다운 패배를 통해 박근혜 후보는 한국의 정당사를 새로 썼다. 1971년 신민당 경선에서 YS가 흔쾌히 승복한 것 말고는 불복(不服)탈당으로 얼룩졌던 악순환의 고리를 멋지게 끊어낸 것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최대 과제로 떠오른 정당정치의 제도화,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대척점에 서 있는 범여권신당은 책임정치의 실종과 정당정치의 파괴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손학규 전 지사와 열린우리당은 대의정치의 근간인 정당정치의 파괴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입만 열면 민주개혁세력임을 자칭하지만, 그들이야말로 반(反)민주세력임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한나라당은 박 후보의 담대한 결단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경제 살리기’가 가장 절실한 국민적 요청이고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그러한 세태의 반영인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성장 단품(單品)으로는 2% 이상 부족하다. 정치 분야의 상품도 내놓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차별화’가 바로 그 대안이다. 참여를 최고 가치로 내건 집권세력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법치주의, 의회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대통령부터 위법시비를 끊임없이 일으켰고, 언론의 자유는 현저히 훼손되었다. 법과 질서는 ‘떼쓰기’에 무너졌다. 정치학에서는 이런 민주주의를 ‘비(非)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 부른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착을 넘어 자유민주주의의 성숙으로 가야 할 한국의 민주주의는 비자유민주주의의 준동으로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이제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개척하고자 하는 선진화시대의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라는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근년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선진화는 경제 분야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질적 향상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선진화 혁명의 핵심 고리는 무엇인가? 바로 풍습을 바꾸는 것이다. 5000년의 찢어진 가난을 타파한 ‘한강의 기적’은 바로 “엽전은 안 돼”라는 패배주의를 떨치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의식혁명과 풍습개조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선진화를 위한 또 한 번의 풍습개조가 필요하다. 그 핵심은 기회균등, 결과승복의 합리적 사회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겠다”는 풍조로는 결코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다. 게으른 자가 부지런한 자를 착취하는 곳에 미래는 없다.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승복하는 ‘합리적 불평등의 수용’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책도 달라져야 한다. ‘노력하려는 자’와 ‘불평불만만 하는 자’는 구별, 취급되어야 한다. 선진한국은 다름 아닌 계층을 초월하여 땀 흘린 사람들이 우대받는 사회다.
풍습을 바꾸는 것은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서 지도자와 선도 집단의 철두철미한 정신무장과 치밀한 실천전략이 요구된다. 한나라당의 쇄신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가치집단으로 거듭나는 것이 핵심이다. 이명박 후보 역시 자신의 모습을 경제 살리기의 적임자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새로운 가치체계의 설계사로 확장시켜야 한다. 수구부패 이미지의 탈색은 ‘좌로 적당히 원 클릭’이라는 기술적 조정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수미일관된 철학과 논리로 무장하는 ‘가치정치(value politics)’의 전면 도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나라당이 그토록 염원하는 정책정당화는 이러한 토양변화가 선행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 이 후보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선진화 혁명을 위한 전략적 구상이 갖추어져 있는지. 만일 빈 구석이 발견된다면, 서둘러 역사와 대화하고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