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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시론;에 이 신문 이신우 논설위원이 쓴 '독수독과(毒樹毒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가대하며 소개합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한 네티즌이 쓴 재미있는 비유를 읽었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의 주민등록 초본이 불법적으로 유출된 데 대해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한명숙 전 총리 등 여권 대선 후보자들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일제히 자기 초본을 공개한 것을 빗댄 글이었다.
이명박 주민등록 초본의 불법 공개로 매스컴이 시끄럽자 정동영이나 한명숙 등은 ‘실체적 진실’이 중요한 것이지 주민등록 초본 공개에 얽힌 ‘절차적 정당성’이 뭐 그리 대수냐는 의미에서 보란듯이 자진 공개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았더라도 그같은 자그마한 탈법 행위보다는 위장 전입이나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더 나쁜 것 아니냐는 반박 의도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서의 네티즌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이명박의 경우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드라큘라와 헌혈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헌혈을 하건 말건 그건 본인의 자유다.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도덕적 비판을 가하거나 법률적 하자를 지적하지 않는다. 그런데 드라큘라에 의해 강제로 헌혈당한다면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선행이 아니라 공포영화다.
이 네티즌이 표현한 헌혈과 드라큘라의 비유를 법조계에서는 ‘독수독과(毒樹毒果)’로 설명한다. 독이 있는 나무는 결국 독이 있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나라의 법이 허용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서나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증거를 이용해 수사에 나설 수 없다는 법이론이다.
물론 이 이론이 실체적 진실을 외치는 자들에게는 빈약한 논리로 비칠 수도 있다. 오히려 범법자들이 절차법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으려는 데 이용될 뿐이라는 비난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다. 대중에게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단어가 더 멋있게 들리기도 한다. 실체적 진실이라는 영화 제목은 매력적인데 반해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영화 제목은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절차적 정당성이 외면당할 경우 우리는 심각한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신정아 동국대 교수의 가짜 박사학위 소동도 마찬가지다. 그는 비록 학력을 속였지만 능력면에서 발군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인물이다. 신정아의 실체적 진실은 큐레이터로서의 실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절차적 정당성의 문제에 불과한 학력 허위 기재를 문제삼아야 하나.
같은 시기, KBS라디오 ‘굿모닝 팝스’의 진행자인 이지영씨도 영국 브라이튼대에서 받은 석사 이력이 가짜로 밝혀지면서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영어권의 웬만한 박사학위 소유자들조차 그녀의 영어회화 강의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세평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지영의 절차적 정당성을 묻지 말아야 옳다.
사회주의 정치 체제가 필연적으로 독재나 전체주의로 빠져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런 나라의 지도자들일수록 도덕률을 법 위에 올려놓는 경우가 많다. 이런 유의 지도자일수록 실체적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그들은 곧잘 법을 무시한 채 대중을 위해 부자의 것을 빼앗아 나눠주는 로빈 후드의 얼굴로 다가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의 정의와 복지’는 ‘지도자의 정의와 복지’로 탈바꿈하게 되고, 일국의 법률 체계는 지도자 자신의 정의와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법의 준수를 요구해봐야 소용이 없다. 일단 무시당한 법이 되살아나 독재자를 견제할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상태다.
법치주의 없이는 민주주의 사회가 존립할 수 없다. 그리고 법치주의는 다름아닌 절차적 정당성을 뿌리로 한다. 실체적 진실 못지않게 절차적 정당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요구되는 이유다. 실력이 있으니 학력의 허위 기재쯤이야 허용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그와 똑같이 위장전입이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해서 주민등록 초본의 불법 유출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