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의 헌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적 사고와 정치적 본능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능력에서 이론적·실제적으로 입증된다.”고 했다. 규범적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논법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현실의 정치 세계는 칼 슈미트의 주장과 거의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선거야말로 ‘적과 동지’가 확연히 구분되는 제로-섬 게임의 무대이다. 거기는 승자와 패자만 있고, 그 중간은 없다. 그리고 유권자에게는 한 쪽의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선거는 버나드 쇼가 말한 것처럼 “도덕적으로 참혹한 일이며, 피만 흘리지 않았지 전쟁처럼 사악하다.”

    그런 선거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 왔다. 후진국일수록 그 정도는 심하다. 흑색선전과 인신공격 등 네거티브 캠페인이 성행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5년 전인 2002년 대선에서 거기에 혹독하게 당했다. “전투에서 적을 속이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라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말이 통용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현실이다.

    같은 정당 안에서 벌어지는 경선은 어떤가? 상식적으로 경선은 본선과 달라야 한다. 정치적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경쟁한다는 것과, 경선이 최종 목표 지점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경선이야말로 하기에 따라서는 ‘축제’가 될 수도 있다. 그 정당의 외연을 넓히고, 정당의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적과 동지’의 이분법이 적용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진흙탕 싸움이다. 상대 정당 사람들에게도 해서는 안 될 말들을 쉽게 내뱉고, 고소·고발 등 법에 의존하는 일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대선 승리는 안중에 없는 것 같고, 오로지 당내 헤게모니 쟁취에 몰두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래서 ‘살생부’ 운운하는 무시무시한 얘기들이 나도는 것이다.

    급기야는 특정 후보 진영과 여권 사이의 커넥션 의혹을 뒷받침할 정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법적인 판단을 떠나, 정치적으로는 두 유력 후보 진영은 ‘동지’일 수가 없음이 확인된 셈이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기에 더 이상 동지라는 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적’이 되었다. ‘동지가 아닌 적’의 수준으로 된 마당에 경선이 끝난 후에 다시 동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 정치가 비상식적이어서 그런 일을 겪고도 다시 합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마음으로 하나가 되기에는 그들이 취해 온 말과 행동이 너무 심각하지 않는가!

    이 모두가 ‘브레이크 없는 질주’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들의 질주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스스로의 절제가 아닌 추돌 사고 때문이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싶어서 실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갠 날에는 그 다음날 비가 온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그들은 무한 질주를 과신했다. 그 결과 그들은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 위기의 본질은, ‘적과 동지’를 분별하지 못한 데 있다. 피아(彼我)를 분별하지 않은 채 당면한 승리에 집착한 데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설령 동지들의 상처를 밟고 승리를 쟁취한다 하더라도, 그 행운은 두 번 연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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