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칼럼 '대통령의 종횡, 사회의 침묵'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조용하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숨은 쉬는지 몰라도 움직임이 없다. 거리에는 날마다 거친 확성기 소리가 귀청을 때리고 작업 현장에는 명분 없는 정치 파업이 요란하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숨소리도, 용기 있는 몸짓도 아니다. 그것은 악쓰는 소리이고 떼쓰는 몸부림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저항의 몸짓이고 권력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 올곧은 비판의 정신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런 정신과 자세가 실종된 상태다.

    대통령이 나라의 기본 틀인 헌법을 ‘그놈’이라고 욕하고 선관위의 지적을 비웃으며 개인 자격의 헌법소원으로 도망가는 엄청난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우리는 ‘우리가 잘못 뽑았지’ 하며 ‘신세 한탄’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대통령이 개인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선거에 개입하고 야당의 후보들을 야비하게 몰아세우는데도 선관위는 조용하다. 대통령이 야당 후보의 공약에 대한 검증 ‘명령’을 내려도 국무회의는 읊조리기에 급급하다. 아니, 공직사회는 한술 더 떠 한 건씩 갖다 바치기까지 한다. 대통령을 ‘나라의 왕’이라고 떠벌리는 작자가 나와도 야단치는 사람이 없고 대통령이 주식시장에 간여하는 ‘지시’를 내려도 이를 간하는 경제 관료가 없다.

    드디어 대통령이 150명의 대학 총장들을 불러 모아놓고 ‘당신들은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비꼬면서 일장 훈시를 해도 총장들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고교 출신이 노력해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 이상으로 평등과 기회 균등이 보장된 나라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어느 총장이 질문했을 법한데도 말이다. 그나마 그 자리엔 없었던 교수들, 그것도 사립대의 교수들이 나서 대통령과 교육부 수장이 강요해온 대학 입시안에 집단 반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그날 청와대 그 자리는 우리 대학의 치욕의 현장이었고 입 다문 총장들의 모습은 우리 지성의 무기력증을 드러낸 표본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국군통수권자인데 온 국민의 추모를 받는 서해교전 전사자에 대한 5주기 추모식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 시간 청와대에서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과 평통자문회의 운영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주었을 때도 우리 군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대통령의 무관심과 면박을 비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신들을 집권시켜 준 정당을 버리고 100년을 갈 거라며 새로 만든 정당이 3년 만에 해체 위기에 놓이자 뿔뿔이 흩어지면서 집권의 책임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집권 세력과 20여명의 대권 ‘이무기’들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별다른 질책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FTA로 가장 득을 많이 보는 집단이 FTA 반대 시위로 파업을 해도, 그리고 그들의 불법 시위로 주말 퇴근길 도심이 완전히 마비돼도 우리 사회는 별다른 반응 없이 대범(?)하게 넘어간다.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부정을 응징하며 권력 남용을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스스로 닦아 왔다. 식민지 시대부터 우리 정신운동의 토양을 이루었던 비판과 저항은 산업화시대, 군부 탄압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이어져 왔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반 부정·반부패·반정치 탄압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역대 선거, 지금까지의 공직자 검증 과정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공인들의 어떤 사소한 실수와 편법은 물론 부정·부패, 권력 남용에 결코 관대하지 않은 전통을 만들어 왔다. 최고 권력자라도 또 그의 가족이라고 해도 이 전통의 저인망을 뚫고 가지는 못했다. 유력한 대선 후보, 능력 있는 총리 내정자와 공직자들이 단 한 번의 잘못과 말 실수 하나로 인해 가차없이 낙마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나라의 근간을 흔들거나 앞으로 흔들 수 있는 주요한 사안들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침묵과 굴종의 현상들을 목도하고 있다. 사회의 지성들, 정권이 바뀌어도 나라를 붙들고 갈 공직사회와 관료사회, 권력의 일탈을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정치권,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우위에 서야 할 시민사회가 활력과 동력을 잃고 안이하고 무기력하게 안주하고 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우리 시민과 사회를 깔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