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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한 후보가 ‘한반도 대운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면서 이에 대한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정책토론회에서 이 정책을 제안한 후보는 다른 후보들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심지어 대통령도 직접 대운하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게 되면서 야당후보를 죽이기 위한 정치적 공작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발언의 기초자료가 된 것으로 믿고 있는 보고서가 조작된 것이란 의혹도 나돌고 있어 집권세력의 특정후보 죽이기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대운하 공약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느낌이며 이 한 문제에 집중하느라 다른 중요한 정책들에 대해 소홀하게 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가 아니라 단순히 운하에 대한 단상에 불과하다.
우선 “대운하”라고 하면 거부감부터 생긴다. 대운하 하면 유럽이나 미국의 운하가 아니라 중국의 대운하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전제군주에 의해 명령되고 수양제가 건설을 완성한 중국의 대운하는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전제군주에 대한 연상 때문에 우선 현대의 민주국가에서 시도할 공사는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다음으로 대운하라고 하면 한국의 산악지형이 머리에 떠오른다. 국토의 70%이상이 산인 나라에서 운하를 건설한다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발상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달리 생각해보면 그리 부정적인 발상만은 아니란 생각도 하게 된다.
우선 토목기술이 발전되지 못한 고대국가에서는 오로지 인간의 육체노동만으로 운하걸설을 하여야 하였으므로 동원된 민초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도저히 민주국가에서 시도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토목기술이 발전하여 인력에 의존하지 않고 기술로 운하를 건설할 수 있다. 그러니 대운하라고 하더라도 비민주적 사회적 동원체제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권력에 의한 불필요한 민중의 동원 없이 기술에 의해 운하 건설이 가능한 지금은 대운하라고 하여도 꼭 전제군주를 연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대운하’라는 말이 수양제를 연상시키므로 운하라는 말 대신에 ‘수로’라든가 또는 ‘수자원개발’과 같은 보다 덜 거창한 용어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한 국토의 70%이상이 산이므로 운하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누구에게나 들 수 있지만 이 또한 잠시 생각해보면 이 생각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과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낙동강이나 한강의 경우 조운선이 상당히 내륙까지 운행되었다고 한다. 근래에 들어와 하상이 높아지고 물의 양이 줄어들면서 배의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문경새재만 뚫으면 된다고 한다. 우리들의 상식을 뒤엎는 현실이다. 또한 지금은 산에 나무가 울창하여 강바닥을 깊게 파게 되면 하상이 모래로 높아질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옛날에 다니는 물길을 다시 뚫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렇다면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운하’라고 하면 꼭 물류와 연관시켜 생각하기 쉽다. 사실 역사적으로 운하가 수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운하의 기본역할을 수송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철도가 생기고 자동차가 수송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면서 운하의 수송수단으로서의 중요성은 낮아졌다. 따라서 지금 운하를 건설한다면 그 주된 기능이랄까 또는 역할은 수송이 될 수가 없다. 문제는 운하(이 글에서는 수로 또는 수자원관리설비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보지만)가 수송 이외에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것이 가치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수송수단으로서의 운하의 가치를 너무 낮게 잡을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 주로 도로를 이용해 해결하고 있는 물류 소요 중 시간에 민감하지 않은 물동량이 있다면 그것을 운하로 운송함으로써 지금 한계에 이른 도로의 수송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도로의 혼잡도는 대기행렬이론(queuing theory)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과부하를 조금 줄여줌으로써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따라서 시간에 민감하지 않은 물동량을 운하로 옮김으로써 도로의 수송능력을 대폭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따라서 운하 자체의 수송능력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크지 않은 수송분담으로 인해 기존 고속도로의 수송능력 향상은 엄청나게 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운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른 가치도 결코 무시하기 힘들다. 우선 물관리효과를 들 수 있다. 만약에 제3차대전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석유가 아니라 물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만큼 물은 지금 귀중한 자원이 되었다. 한국도 현재 물 부족국가로 분류되어 있다. 운하를 건설하여, 사실은 기존의 하천을 정비하여, 다량의 물을 항상 흐르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은 큰 자산이다. 다시 말해 운하는 수자원관리 수단으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풍부한 수량의 물을 확보함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우선 내륙 도시들의 발전계기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도로를 뚫어도 물이 없으면 발전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문경이나 상주 같은 경우 고속도로가 지나가도 물이 없으면 발전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수량이 풍부한 하천(운하)이 옆을 흐르고 있다면 발전의 가능성은 크다. 이 말은 운하로 인해 지금까지 발전할 수 없었던 내륙도시들이 발전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서울에 있는 관공서를 지방으로 이전하여 지방발전을 도모하기 보다는 물길을 터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지방발전 방안이 될 수 있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가치 중의 하나는 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정서적 가치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깊게 흐르는 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물길을 따라 흐르는 것은 단지 상품만이 아니다. 물길을 따라 사람도 이동하며 문화도 이동한다. 뿐만 아니라 여유로운 마음이 물길을 따라 흐르게 된다. 도로는 급하지만 물길은 여유롭다. 운하를 따라 순항여행(크루저)을 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운하와 같은 대토목공사는 비용대이익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를 들였는데 얼마를 벌었다는 식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계산은 이익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서나 하는 프로젝트 평가 방법이다. 국가적 토목공사는 비용대편익분석을 하게 된다. 편익에 포함되는 가치는 반드시 운하의 건설 주체가 거두어 들이는 것만 계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국민 전체가 얻게되는 편익 모두를 합해서 얻게 된다. 그런데 편익의 많은 부분이 계량화할 수 없는 정서적인 것, 미적인 것, 자연보존적인 것, 또는 미래발전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이런 요소들에 대한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도 많다.
마지막으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운하의 건설은 국민적 선택의 문제이지 과학적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계산해서는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는 명품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에 부수되는 다른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운하를 단지 다른 한 수송로로서 다룬다거나 또는 건설비용대 이익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단견이다. 사회적 효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판단할 문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필수품보다는 사치품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듯이 사회가 발전하게 되면 단지 필수기능에만 비중을 두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미적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선택할 수도 있다. 가난한 시절에는 단지 비와 눈만 피할 수 있다면 훌륭한 집이지만 소득이 높아지면 정원에 나무도 심고 잔디도 깔고 화단에 꽃도 피우게 되는 법이다. 이것은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운하도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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