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특파원 칼럼'에 이 신문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이 쓴 <논객들이여 ‘정치 커밍아웃’을>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3일자 워싱턴포스트에 낯선 칼럼이 실렸다. 이라크에서 미국이 철군하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네오콘 이론가인 로버트 케이건 카네기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이 쓴 글이다.

    눈길을 끈 것은 맨 아랫줄의 필자 소개였다.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게 외교 정책을 사적으로, 무보수(informal and unpaid)로 조언해 왔다”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이 ‘자기 고백’은 독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글을 다시 읽게 됐고, 정치적 목적 때문에 무리한 논리 전개가 있었는지를 살폈다. 글은 ‘이라크 파병 미군이 너무 적다. 병력을 증강해 혼돈스러운 이라크를 장악하라’는 논리를 편 매케인 상원의원의 견해와 비슷했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을 두고 갈피를 못 잡던 중도적 독자에게 이 글은 어떤 방향을 제시했을 수도 있다. ‘정치참모의 정치적 글’이라며 애초부터 외면받았을 수도 있지만.

    이런 ‘커밍아웃’은 케이건 연구원이 비공개 참모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정치적 위치 때문에 점수를 깎이더라도 자기의 글을 판단받겠다는 지적 자존심의 산물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훗날 ‘매케인 백악관’에 참모로 발탁되고 ‘사실 오래전부터 참모였다’는 기사가 뒤늦게 나온다면 독자들의 허탈감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 될 것이다.

    이처럼 ‘고집스러운 정직성’은 하버드대 데이비드 거겐 교수가 쓴 대통령 기록서(‘Eyewitness to Power’)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1990년대 초 공영 PBS 방송에 해설가로 고정 출연할 때 “내가 빌 클린턴 후보와 (정기 토론 모임을 갖는) 친분이 있음을 시청자에게 주지시켰다(alert)”고 회고했다. 클린턴의 정책에 우호적으로 말하더라도 ‘새겨서 들어라’라는 주문이었다.

    ABC방송은 월트 디즈니 관련 내용을 보도할 때 “그 회사는 ABC의 주주”라고 밝히곤 한다.

    하지만 미국이라고 뭐든지 낱낱이 드러내는 모범사회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2004년 9월 CNN방송의 논쟁 프로그램(‘Crossfire’)의 4인 공동 진행자 가운데 2명이 민주당 후보의 참모라는 게 폭로됐다. 이들은 언론 보도 직후 “캠프에 책상도 없다…돈도 받은 적 없다”고 해명한 뒤 방송을 계속했다. 

    케이건과 거겐의 엄격함과 CNN의 무리수는 한국의 정치 지식인 미디어에 무언의 암시를 주는 듯하다.

    지금도 주요 대선후보의 참모진 이름이 신문에 속속 공개되고 있고, 일부 자문교수는 아직도 신문에 글을 쓴다. 하지만 누구누구의 참모라는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정적 지지 정도가 아니라 선거 캠프에 정식 참여하는 비공개 참모가 칼럼을 쓰거나 TV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지난해까지 청와대에서 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씨는 2001년 11월 노무현 캠프에 참여했다. 그는 2002년 초부터 KBS 라디오에서 경제 해설 프로를 진행했고, 그의 진보 감각의 해설은 청취자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외곽 조직에서 일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놨을 리 만무한 그는 유권자들에게 ‘객관적 안내자’로 비쳤을 법하다.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 그가 캠프에 관여했다는 기사는 2002년 모든 매체를 통해 ‘딱 한 문장’ 찾아볼 수 있었다.)

    지나간 일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만의 일도 아니고 과거 다른 정부에서도 더러 눈에 띄던 일이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달라졌으면 한다. 정치적 위치를 공개할 결심을 한 학자를 높게 평가하고, 이를 권장한 미디어에 박수를 보내는 문화가 생겼으면 좋겠다. 객관성을 앞세운 논객 가운데 혹여 선거 캠프 참여자가 있다면 당당하게 커밍아웃할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