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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 '조선데스크'에 이 신문 이한우 문화부 차장대우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진보의 목소리가 안들린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온 사회를 뒤덮을 듯 기염을 토하던 그들의 목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 간혹 북핵문제나 한미FTA와 관련해 일부 인사들이 목청을 높이기는 하지만 그 때마다 여론의 외면을 당한다.
진보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계간지들은 속속 휴·폐간하거나 독자 감소의 고통을 겪고 있다. 소위 진보적 인터넷 매체들이 이슈를 만들어냈다는 소리를 들어본 지도 오래됐다. 한때 날리던 좌파 진보 논객들은 올해가 대선의 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얘깃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파나 보수에 대한 공격은 고사하고 자신들끼리의 논쟁도 거의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뉴라이트다 뭐다 해서 시끌벅적하기까지 한 우파에 비해 좌파 진보는 깊은 무력감과 침묵에 빠져 있다. 이제 그 원인을 짚어볼 때도 됐다.
공동화(空洞化)라고 했던가? 한국 지식사회의 좌파 내지 진보들은 노무현정권 5년을 지나면서 말 그대로 중심이 텅 비었다. 우선 절대수에서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상당수가 정권에 들어가 녹(祿)을 먹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공직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던 탓에 권력을 누릴 줄은 알아도 책임질 줄을 몰랐다. 능력도 따라주지 않았다. 뭐니뭐니 해도 좌파의 권력화가 공동화의 가장 큰 원인이다.
두번째는 진보의 희화화다. 이 땅의 진보들은 언제부터인가 민족지상, 민족만능을 부르짖으며 ‘북한 편들기=진보’라는 괴상한 도식을 만들어냈다. 여기에는 백낙청 교수로 대표되는 소위 ‘창비’ 진영이 대표적이다. 도식도 안들어맞는 게 한두 번이지 북한의 저질스러운 행태가 반복되면서 이제는 ‘진보의 요람’이던 대학생들까지도 북한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져 버렸다.
좌파들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더 이상의 이념적 발전은 포기한 채 북한 편들기에만 매달렸다. 그것이 김대중정권 때는 어느 정도 통했지만 노무현정권 들어와서는 내부적으로도 불협화음을 내더니 결국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한국의 진보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세번째,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할텐데, 진보의 시대착오성이다. 이들은 20년 전에 읽었던 책대로 지금도 세상을 보며 그렇게 바꿔보려 한다. ‘리영희’라는 사람이 북한에 가서 자기 책을 읽은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고 있다고 북한 당국자들에게 자랑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다. 국민들의 귀한 돈으로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 마구잡이식 역사 파헤치기를 할 수 있다고 믿고서 그렇게 하는 것도 20년 전에 읽었던 책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다.
결국 현재 대한민국의 좌파 진보세력이 수구(守舊)의 늪에 빠져든 것은 우파나 보수세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봐야만 현정권이 느닷없이 시작한 제2차 언론과의 전쟁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정권 초기의 제1차 전쟁에 이어 이번 제2차 전쟁에는 권력화한 진보, 웃기는 진보, 시대착오적인 진보를 대표할 만한 인사들이 권력의 요직에 앉아 앞장서서 칼을 휘두르고 있다. 갑작스런 선전포고의 배경에 대해 이런저런 정치적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결국은 어설픈 집권 진보세력이 자기파탄을 인정하지 않고 언론에서 희생양을 찾으려 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이다. 곧 지식인 사회에서 ‘진보의 성찰’을 넘어 ‘진보의 죽음’을 알리는 논의들이 나올 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