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 '오후여담'에 이 신문 김재목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의 40, 41대 대통령을 연임한 레이건의 ‘병상유머’는 유명하다.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1981년 피격사건. 레이건은 존 힝클리라는 정신병력의 청년으로부터 저격을 받아 응급실로 실려갔다. 긴급 수술을 받은 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둘러싼 측근들에게 웃으며 한마디. “할리우드에서 이렇게 저격당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면 배우를 그만두지 않았을 텐데….” 잔잔한 웃음이 병실에 퍼졌다. 레이건은 1930년대 후반 할리우드에 들어가 60년대 초반 정계에 진출할 때까지 5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특별한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의 병상유머는 미국민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대통령의 무사함과 여유에 미국민은 크게 안도했다.

    세월을 거슬러, 독일군의 포격으로 영국 버킹엄 궁이 무너졌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민을 안심시킨 재치와 유머 이야기도 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독일군의 포격 덕분에 왕실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게 돼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상투적 언어로 자신감을 과시하지 않았다. 대신 국민에게 가벼운 웃음을 선사하고 불안감을 없애주려는 지도자의 격(格)을 보여주었다. 위기상황에서도 침착함과 여유를 잃지 않는 지도자의 유머, 그것이 강력한 리더십의 요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세치 혀가 백만 군사보다 강하다’는 명제도 이럴 때‘참’이 될 수 있다.

    정치는 ‘말의 예술’이라고 한다. 세치 혀를 올바르게 썼을 경우의 얘기다. 잘못 놀리면 독약보다 지독할 수 있다. 유머의 경우도 마찬가지. ‘때’와 ‘장소’와 ‘언어’의 적실성 등 세 요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을 때만 유머의 순기능은 극화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됨은 물론이다.

    최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유머’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는 영화 ‘마파도2’에 출연한 김수미·여운계·김을동·김형자씨 등을 겨냥해 “살짝 한물가신 중견 배우들이…”라고 비유했다. 또 “…아마 공짜로 나오라고 해도 나왔을 거야”라고도 했다. 비판의 시선들이 쏟아졌지만, 이 전 시장은 “유머러스하게 대화를 한 것이지…”라고 해명했다. 해당 배우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오해없음’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유머와 품격, 또 유머의 품격을 생각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