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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주용중 정치부 차장대우가 쓴 <"너무 그러지들 맙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새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년 만에 다시 정당을 취재하게 된 내게 한나라당의 A 대선주자를 주로 취재하는 후배가 말했다. “얼마 전 B 대선주자의 측근 의원을 만나 악수를 청했더니 그분이 손을 내밀다가 ‘적진(敵陣)에서 온 기자’라며 손을 빼더군요.”
그 후배의 씁쓸함을 나도 10년 전 이맘때쯤 겪었다. 당시 나는 이회창 전(前) 한나라당 총재를 담당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이 전 총재를 밀착 취재하는 게 주어진 임무다. 언론사는 효율적이고 집중적인 취재를 위해 중요 정치인들을 기자에게 나눠 맡긴다. 이런 기자들을 정치권에선 ‘마크맨(mark man)’이라 불렀다. 언제부턴가 나에겐 ‘이회창 기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한나라당엔 이 전 총재를 포함해 9용(龍)이 있었는데,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9용들의 이름을 따 ‘○○○ 기자’로 불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 날 동료를 대신해 다른 용의 캠프에 갔더니 한 의원이 했던 말. “이회창 기자가 여기 왜 왔어?”
이회창 ‘담당’ 기자를 이회창 ‘지지’ 기자로 낙인 찍어 버리는 정치인들, 그리고 정치인들의 그런 장단에 맞춰 같은 언론계 동료를 편가르는 일부 기자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해야 특정 기자를 주눅들게 하거나 그 기자의 취재 폭에 제한을 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이런 편가르기의 마음 속 뿌리는 무엇일까’….
기자들마저 이렇게 갈라놓는데 정치인들끼리는 물어보나마나다. 지난주 초 강재섭 대표의 진퇴를 둘러싸고 한나라당이 시끄러웠을 때 한 초선의원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사이에서 드물게 중립을 지키는 의원이었다. 그는 “두 대선주자 캠프로부터 ‘강 대표 체제가 무너지면 당이 깨진다’ ‘강 대표가 물러나야 당이 개혁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달라는 전화를 하루 동안 수십 통 받았다”고 했다. 이미 특정 주자에 줄 서 있는 자신들이 얘기하면 사람들이 ‘구당(救黨)을 위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당신이 대신 얘기해 달라고 졸랐다는 것이다. 그 초선의원은 “의원들마다 누구 사람이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있으니 한나라당에 마이크가 성한 의원이 없다”고 했다.
김진홍 뉴라이트 전국연합 상임의장은 며칠 전 “한나라당 개혁을 얘기하면 누구누구 측이냐, 자꾸 이렇게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소연했다. 발언의 진정성은 따지지 않고 그 발언이 어느 주자에게 유리한지, 어느 주자에게 줄 선 것은 아닌지부터 따진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4·25 재보선 참패 후 사퇴한 사무총장 등 후속인사를 열흘이 넘도록 못하고 있다. 강재섭 대표는 “(대선주자) 캠프가 사람을 다 불러가서 당이 인사 이동을 제대로 할 수 없고 회의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편가르기에 가위눌린 한나라당의 신음소리다.
어릴 적 우리는 편을 갈라서 놀이를 하곤 했다. 손바닥을 뒤집거나 펴서 편을 짜 놀다가, 때가 되면 서로 손을 내밀어 다시 편을 짰다. 편을 가른다는 것은 게임의 편의나 효율을 위해서였지 적이나 원수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통령 선거의 당내 경선이나 본선도 결국 이런 놀이 아닐까. 정치인이나 기자나 잠시 역할을 맡은 배우 아닐까. 편가르기도 어느 정도껏 하는 것이지, 배가 쪼개지는 줄도 모르고 편을 가르다 보면 함께 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 기자’ ‘박근혜 기자’ ‘손학규 기자’ ‘정동영 기자’…. 다시 찾은 정치권엔 예전과 다름없이 대선주자 이름으로 불리는 기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어느 대선 주자 캠프에 들러 평소 좋아하던 정치인을 만나 악수를 청했을 때, 그가 만일 ‘적진에서 온 기자지’라며 손을 거둬들인다면 웃으며 말할 것이다. “너무 그러지들 맙시다.”





